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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Oct 01. 2021

트럭이 귀여워진 이유  

집 근처에 우체국이 있는데 가끔 때가 맞으면 우체부 아저씨들의 오토바이가 떼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왠지 몰라도 진귀하다. 똑같은 오토바이들이 각자 다른 사연들을 싣고 한꺼번에 나와서 여러 갈래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는 날엔 근거는 없지만 뭔가 즐거운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웃는다.


얼마 전에는 귀여운 트럭들이 줄지어 나오는 것도 보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택배차는 1톤 내장 탑차인데 높이가 2.4m 정도 된다. 최근에는 택배차를 지상 주차장으로 통과하지 못하게 하는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높이를 줄인 저상 탑차가 출고됐다. 나는 귀여운 트럭이라고 부르고 있다. 일반 탑차보다 층고가 0.5m 이상 작아져 아파트 지하주차장의 높이를 사뿐히 통과할 수 있다. 물론 적재함은 더 작아졌다. 점점 눈에 띄는 걸 보니 늘어나나 보다.


사진 출처 뉴시스

어찌 됐든 이런 문제를 개선하려고 귀여운 트럭이 나왔으니 이제 택배 아저씨들은 좀 편해졌을까?

택배 노동자 여건 개선을 위해서 여러 곳에서 목소리도 내고 파업도 하지만 결국 탑차의 크기를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걸까. 좁아진 화물칸에서 허리를 굽힌 채 지속적인 근육통에 시달려야 하는 택배 기사를 보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가? 큰 차들은 지상으로 오지 말고 아파트 입구에서 택배 물품을 수레에 싣고 집집마다 배송하라는데 그게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럼 택배를 받으러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나오기는 싫고 통로 앞에 트럭이 주정차하는 것도 싫으면서 택배는 빨리, 무사히 집 앞에 놔달라니.


지난 2018년 한국교통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택배 노동자들의 하루 평균 노동 시간은 12.7시간, 월평균 근무일은 25.6일이었다. 이렇게 일해서 가져가는 순수입은 평균 302만 원으로 조사됐다. (출처: 뉴스타파 기사문 발췌)


토요일도 일하면서 딱 빨간 날만 쉰다는 택배 노동자들, 날라야 하는 물건은 하루 평균 약 400개. 밥 먹을 시간도, 이렇다 할 휴식시간도 없이 불철주야 일하는 택배 노동자에게 아파트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야박을 넘어 멸시다. 작아진 차로 지하주차장까지 들어오는 걸 허락한다고 해도 분명히 무슨 핑계로든 무시할 게 뻔하다. 한 조사에 의하면 물량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의 모멸 섞인 발언이라고 했다. 하루에 2만 4천보를 걷는다는데 왜  안 힘들겠나. 하지만 그런 물리적 어려움 속에서도 더 많이, 더 빨리 배송하고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어서 몸을 혹사하면서 일하는데 왕왕 날아드는 모욕적 언행을 접하면 나라도 힘이 쪽 빠질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인터넷 판매를 부업으로 한 적이 있다. 아기 돌 답례품을 떼기도 하고 제작도 해서 팔았다. 인터넷으로만 거래기 때문에 자주 오던 택배 아저씨와 계약을 해서 박스당 2500원에 박스를 내보내기로 했다. 답례품 특성상 대량으로 출고가 되는데 박스당 수건은 100개, 컵이나 그릇은 20-30개 정도 들어갔다. 수건 100개는 무게는 별로 나가지 않지만 부피가 커서 들기가 어렵고, 컵이나 그릇은 당연히 무거웠다. 지금 생각하면 2500원에 계약을 했다는 게 미안하다. 아저씨가 2500원에 그 무거운 박스를 들고 9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 수레에서 다시 높은 차에 옮겨 싣고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제발 안 깨지고 고객에게 도착하기' 만을 바랐다. 그 아저씨가 겨우 몇 백 원 벌자고 허리와 등이 바스러지는 아픔을 겪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시에는 깨진 물건을 또 물어줘야 하는 게 아까워서 아저씨가 혹시나 내 박스를 던지지는 않나 쳐다보고 있었다. 돌아보니 너무 미안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혹은 작금의 뉴스들을 접하면서 생각이 많이 바뀐 것은 사실이다. 반복되는 택배기사들의 죽음, 자꾸만 알려지는 무상 노동의 실체들을 보면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더니 어째서 사람을 저렇게 취급하는가 싶어 마음이 아팠다.


생각해보면 몰라서 그렇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는 잘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는다. 택배 노동자, 배달 노동자. 그들이 얼마나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노동 환경에서 일하는지 알아야 한다. 안다면 마음이 바뀐다. 눈치만 채지 말고 정확하게 마주 봐야 한다. 그래야 미안해하고 반성한다.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라는 영화에는 택배 노동자의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잘 몰랐는데 한 예능 프로그램이 노동자의 날 특집으로 다루어서 알게 됐다. 그때 영화를 보고 울었다. 잘 살고 싶어서 자꾸만 노력하는데 자꾸만 엉망이 되어가는 리키의 삶을 보고서 안타까워서 울었고, 주변에서 만나는 택배 아저씨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서 울었다. 좁은 골목에서 아무렇게나 세워진 택배 트럭을 보면서 클락숀을 울렸던 적이 있음을 창피해서 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층마다 눌러놓고 문 열릴 때마다 던지듯이 택배를 놓는 아저씨들을 뒤에서 째려보던 나의 모습이 한심해서 울었다.


이미지 출처 : 노동과 세계


사촌동생이 한 때 택배 일을 한 적 있다. 동생은 이전부터 회사 생활을 좀 어려워했다. 그래서 그의 부모가 어렵지만 빚을 내서 택배 트럭을 사 주었다. 그는 영화 속 리키처럼 계약을 했다. 말은 개인사업자라고 하면서 계약을 하지만 사실은 고용당한 것이다. 어쩌면 징용당한 걸지도 몰랐다. 새벽부터 무보수로 물류 분류 작업에 참여해야 했고, 하루 종일 밥도 못 먹고 일을 하지만 택배 상자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게 10개월을 일하고 그는 쓰러졌다. 기절하고 쓰러진 게 아니라 숨을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큰엄마가 전화를 받고 도착했을 때, 동생은 한 공터에 아무렇게나 차를 박고 핸들에 엎드려 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자마자 숨이 안 쉬어진다고 말하던 서른다섯의 아들을 보면서 큰 엄마는 가슴을 치며 엉엉 울었다고 했다. 큰엄마의 작은 차에 남은 택배를 가득 싣고 골목마다 다니며 같이 돌리고 나서 회사로 갔단다. 사정 설명을 하고서 그 길로 그만두고 심리 치료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도 회사에서 못 받은 돈 2500만 원과 차량을 사느라 빌린 돈 1500만 원이 상흔처럼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제 택배 당일 배송은 당연한 일이 되었고, 심지어 전날 밤에 주문하면 다음 날 새벽 집 앞에 물건이 놓여 있을 정도다. 그런데 택배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 늘어남과 동시에, 택배업에 종사하는 이들의 목소리도 절박해진다. 노동자들의 요구사항은 불공정 계약을 취소하라는 것인데, 특히 새벽부터 4-5시간에 걸쳐 진행되는 물류 분류 작업이 무보수로 진행되는 점을 문제 삼는다. 이들은 다른 노동자를 고용하여 일을 처리하든지 아니면 정당한 대가를 줄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업계는 '관례'상 해당 업무는 담당 노동자가 직접 해 왔으며, 이미 배달 수수료에 이런 작업 비용이 포함되었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오찬호, <지금 여기 무탈한가요?> 중에서


트럭이 귀여워진 이유는 사람들의 이기심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들이 몰라서라고 생각한다. 제발 남의 일에 관심 좀 갖자. 고기가 처음부터 고기였던 것이 아니듯 택배도 바람 타고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제발 좀 인식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귀여워질 수 없는 트럭도 엄청 많이 있단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어렵게 사서 모은 트럭이다. 영화 속 리키처럼 하나밖에 없는 차도 팔아야 했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아, 때론 빚까지 내서 산 트럭인데 갑자기 어떻게 저상 탑차로 다시 사겠는가. 가만 보면 귀여운 트럭은 우체국처럼 공기업이나, 백화점, 대형마트, 홈쇼핑처럼 소위 돈 있는 곳에 고용된 노동자가 몰 수 있는 트럭이었다. 그러니까 아직도 일반 탑차를 모는 계약된 노동자들은 절대로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여전히 아파트 입구에서 씨름하고 있다는 사실을 좀 알아차렸으면 좋겠다. 빨리 가야 하는데, 아직 물건이 많이 남았는데 속울음을 삼키며 힘들게 수레에 그 많은 물건을 차곡차곡 담아 올리는 택배 노동자들을 직접 눈으로 보았으면 좋겠다. 그들에게 귀여운 트럭을 기대하지 말라.



저마다의 사연을 싣고 달리는 우체부 오토바이처럼 택배 트럭에도 저마다의 기쁨과 필요가 담겨 있다. 며칠을 기다려서 받는 소중한 이의 무엇일 수도 있고, 가볍게 소유할 편리와 즐거움일 수도 있다. 부모의 사랑일 수도 있고, 자식의 효심일 수도 있다. 받을 때의 기쁨을 안다면 최소한 감사 정도는 했으면 좋겠다. 물론 문제를 알고 바뀌려는 선한 움직임도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숙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오찬호 작가의 말처럼, 차별에 찬성하고 불평등에 눈감는 세상에선 그 누구도 괜찮지 않다. 지금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나와 다른 세계가 아니다. 이것은 분명하다. 어떠한 차별도 묵인하지 않는 개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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