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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Oct 05. 2021

부모를 좀 도와주세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방침도 있으시겠지만 청불 등급은 부모님께서 함께 시청하시더라도 아동에게 보여주는 것은 불가합니다. 아직 두뇌 성장이 완성되지 않은 아이들이라 받아들이는 것이 성인과 다르기 때문에 감정적, 충돌적인 성향을 더 자극시키고 폭력적 태도를 더 증가시킨다는 연구결과 보고도 있습니다. 부모님의 각별한 지도 및 관심 부탁드립니다.'


며칠 전 학교에서 올린 소통 알리미 내용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구구절절 옳게 들어간 메시지였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영상물 등급 제도까지도 도표로 추가해 일러주었다. 고마웠다. 선생님이 그래도 아이들에게 신경 쓰고 있구나 감사했다. 그런데 살짝 '나도 한다고 하는데'하는 불편한 생각이 올라왔다. 그즈음 나 역시 아이들에게 번갈아가면서 시달리는 중이었다.


"엄마, 나도 오징어 게임 보면 안 돼? 애들 다 봤단 말이야."


'애들 누구? 어떤 정신 나간 부모가 그런 드라마를 초등학생에게 보여준대, 응?'


못됐게 쏘아붙이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으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청소년 관람불가는 이유가 있다는 둥,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그런 영상물은 좋지 않다는 둥의 맞는 말도 늘어놔 봤고, 엄마는 넷플릭스 아이디가 없다는 기술적인 말도 해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아빠에게 물어보라고 회피하기도 했다. 아빠는 엄마더러 물어보랬다는 말이 돌아왔다. 끙, 소리가 절로 나왔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예고편 캡처


얼마나 인기 있는지는 내가 굳이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도, 볼 예정도 없지만 그 잔혹성과 선정성을 위시해 인기몰이를 거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스트리밍 할 계정도 없건만 아이들은 계속 보고 싶다고 조른다. 그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지만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하는 것도 아니고, 광고를 특별나게 하는 것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처음엔 친구들의 입이었다. 친구들은 만나면, '어제 오징어 게임 봤어?'라고 묻는단다. 처음에 애들이 내게 '오징어 게임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우리 어릴 때 즐겨하던 놀이 '오징어 삽치기'인 줄 알았다. 바닥에 오징어 모양의 선을 그어 놓고 돌을 던져 깨금발로 뛰어가 돌을 집어 돌아오는 놀이. 지구력과 순발력을 모두 요하던 즐거운 골목길 놀이. 30년 만에 그것은 아주 잔혹한 살인 게임을 표현한 드라마가 된 줄도 모르고.


어째서 성인 관람 등급임에도 아이들이 서슴없이 볼 수 있는가. 그것은 짤의 위력이다. 짤은 긴 동영상을 절단하거나 압축해서 볼 수 있게 올려두는 티저 영상을 말한다. 드라마 자체는 청소년 관람불가라 영상 옆에 동그라미로 19라고 적어 두기라도 하지만 소위 '짤'에는 그런 표시도 드물다. 실제로 그게 있다손 치더라도 재생해서 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휴대폰으로 못 보게 하면 컴퓨터로, 것도 안되면 피시방으로 가버리는 게 아이들이다. 한 번 노출된 아이는 당연히 완전한 영상을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인데, 설령 '짤'만 본다고 해도 이미 그 폭력성과 선정성에는 속절없이 노출되고 만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틱톡이나 유튜브에서도 짤이 서슴없이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부모가 말 안 해줘도 다 알아서 공유하고 감상한다. 부모가 함께 시청은커녕 부모가 아이들로부터 소비 과정을 배운다. 이것이 현실이고 주소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봤는지 확인까지 하는 현실세계에서 부모의 관심과 지도로 보지 않는 아이가 되는 것은 판타지다.


2021년을 사는 1980년대 생들은 2000년이 훌쩍 지나 태어난 아들, 딸을 어떤 방식으로 안전하게 기를 수 있는지 고민하느라 머리가 센다. 1950년대에 태어나 우리를 키운 부모세대가 부럽다. 적어도 나와 같은 문제로 골이 지끈거릴 일은 드물었을 것 같다.


미디어의 범람과 자극적인 광고 때문에 주입식으로 심어지는 폭력성 가운데 자유로울 수 있는 아이는 거의 없다. 아예 휴대폰, 태블릿, 컴퓨터, 텔레비전이 없이 살면 되지 않냐는 고답적인 태도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안 사주면 내 애만 도태되는 기분이고, 사주었더니 결과가 참혹하다.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다. 맞벌이하는 부부가 학교를 마치고 혼자 학원에 갔다가 동생까지 찾아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 어린 아들에게 휴대폰을 쥐어주지 않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당신은 뭐라고 할 것인가?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일을 그만두고서라도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시간은 태엽처럼 감아지지 않는다는 것에 너무 속상한 엄마가 앞에 있다면 뭐라고 말해줄 것인가.


내 부모세대는 몰랐던 미증유의 난제 앞에서 그래도 나는 애쓰고 있다. 보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라서 최대한 관심을 다른 데로 유도하려고 하기도 한다. 예전처럼 틀어주는 대로 보는 나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기기를 뺏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으니 그런 미디어는 상상의 산물이고, 인간은 절대 그런 취급을 받을 존재가 아님을 끊임없이 이야기해 주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하지만 솔직히 지쳤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절대 안 사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런 세상에서, 그런 도시에서 살고 있는데, 노력도 적잖이 하고 있는데 나는 어떡할까.


아동 청소년의 인권문제가 대두될수록 어른의 역할은 그 무게를 더한다. 아이들이 바르고 깨끗하게 자라기 위해 우리의 노력은 자명한 일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오염시키는 영상은 비단 한 개의 드라마만이 아니다. 사실상 너무 많은 미디어가 아이들에게 유입되지 않도록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책임을 부모에게 지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는 성인용 미디어로부터 홀로 아이를 보호한다는 자체가 손가락으로 물을 움켜쥐는 행위처럼 잗다랗게 느껴진다. 부모의 지도만으로는 어렵다. 우리에게도 도움이 필요하다.




지금은 중학생인 아이가 저학년일 때 경미한 틱 증상이 온 적이 있다. 어느 순간 눈에 띄게 눈동자를 굴리는 현상이었다. 제제도 해보고 모른 척도 해 보았는데 나아지질 않았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일하느라 시간도 잘 안 났고 막상 가려니 두려운 마음도 있어서 차일피일 미뤘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걸어서 아이의 증상을 아는지 물었다. 안다고 대답하면서 민망하여서 병원에 데려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어머니 일하시느라 바쁜 거 압니다. 어머니 수업 한 두 개 빼시고 당분간 하미 끝날 때마다 학교 앞에 오셔서 떡볶이도 사주시고 아이스크림도 사주시고 하세요. 하미 정도면 어머님과 제가 힘을 합쳐서 병원 안 가고도 고칠 수 있습니다. 저희 아이도 경험 있어요, 어머니."


나는 그 길로 하미와 매일 데이트를 시작하였다. 열흘 가량 아이를 데리러 갔다. 바로 학원으로 가야 했지만 양해를 구하고 떡볶이도 사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었다. 가방을 받아주고 집으로 같이 걸어오는 행위만으로도 아이는 기뻐했다. 내가 도저히 갈 수 없는 어떤 날에는 전화를 해서 사과를 하고 계속 관심을 쏟았다.


선생님은 내게 매일 문자로 오늘 몇 번 눈을 깜박였는지 말해주었고 이름을 크게 부른다거나 발표를 시키면 주로 증상이 온다는 걸 파악했다면서 요즘엔 아이를 부르는 걸 자제한다고 했다.


사실 그때 우리 반 담임은 학교에서 무섭기로 소문났었다. 실제로 아이도 집에 와서 무섭다고 여러 번 말했다. 아이의 틱 증상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보내는 신호기 때문에 매일 학원 가고 동생을 봐야 하는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학교에서의 긴장도 원인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담임은 노력했다. 무조건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같이 하자고 하는 말에 나는 울었다. 남편보다 선생님이 위로가 됐다. 같이 노력해 줄 누군가가 지금도 필요하다.


솔직히 말하면 학교로부터 이런 문자를 받고 싶다. 어쩌면 위로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안녕하세요 학부모님, 요즘 아이들 사이에 관람해서는 안 되는 등급의 드라마를 보는 게 유행이라고 합니다. 부모님이 보여주시지 않아도, 못 보게 애를 쓰셔도 이미 범람하는 영상들 때문에 심란하시죠. 아이들이 미디어에 아예 노출 안되었으면 좋았겠지만 너무 많은 이유들로 아이들은 미디어 홍수에서 벗어날 길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해서 우리 학교에서는 바르게 미디어 소비하는 법, 왜 등급에 맞는 콘텐츠를 봐야 하는가, 나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미디어를 스스로 차단하기 위한 노력 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학교에서만 한다고 완성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들도 바쁘시겠지만 많은 대화를 통하여 아이들이 비판적으로 미디어를 소비하고, 무분별하게 보지 않도록 애써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같이 노력한다는 건 아름다운 일이다. 부모만큼 아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모든 부모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책임을 내동댕이 치겠다는 것도, 학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다양한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각별한 지도도 필요하지만 학교도, 나라도, 사회도 힘을 보태주면 좋겠다. 우리는 도움이 필요하다.


어린이는 사회 바깥에서 다 자란 다음 사회에 배치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다. 어린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 속에서 자란다. 가정에서 보는 것, 학교에서 배우는 것을 기초로 삼아서 세상을 보고 세상을 배운다.

                                                                                     김소영,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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