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고양이를 기른다. 기르는 게 아니라 숫제 자식으로 품고 산다. 이름은 쿠쿠와 미소. 형님으로 치자면 미소지만 가만히 지켜보자니 쿠쿠가 한 수 위다. 나 역시 조카처럼 예뻐하는 녀석들이다.
며칠 전 올케가 길고양이를 데려왔다. 올케는 회사 앞에서 새끼 고양이를 발견하곤 추위에 떨고 있단 문자와 함께 사진을 찍어 내 동생에게 보냈다. 동생은 데려와 키우자고 했다. 두 마리 있는 곳에 세 마리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착한 마음이다. 밖에 두면 그대로 꺼져 버릴지도 모르는 작은 생명을 거두기 위해 병원에 데리고 갔고, 진찰 후 주사도 맞히고 데려와 따뜻하게 씻겼다. 자리를 마련해주고 체구에 맞는 밥그릇을 준비했다. 평소에는 인터넷으로 사료를 사두지만 예기치 않은 손님의 입장에 부랴부랴 마트로 향했다. 영양이 다량 함유된 아기 고양이용 사료를 일부러 사서 가득 부어주었다. 큰 고양이들이 방해할까 봐 따로 떼서 먹게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온갖 정성과 집중에도 삼일 만에 죽었다. 아마도 태생부터 너무 약했을 거라고 병원에서 말한 모양이다. 죽은 고양이를 어쩌지 못해 내게 전화를 걸었다.
동물의 사체는 법적으로 땅에 묻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버려야 한다. 내가 말해 주었지만 동생은 망설였다. 작고 깨끗한 상자에 담아서 쓰레기봉투에 넣는 것 이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동생은 울면서 그렇게 처리하였고 그러고도 죄책감에 밥을 먹지 못했다. 착한 마음이었다.
문제는 그 후로 이틀 후에 찾아왔다. 원래부터 너무 많이 먹던 고양이 미소가 곡기를 끊었다. 삼일을 내리 굶더니 앉은자리에서 설사를 하더라고 했다. 안아보니 아래로 축 쳐지더라고. 동생은 병원으로 갔다.
범백이었다. 범백은 아기 고양이에게 걸리면 치명적인 고양이 백혈병이다. 성묘도 치사율이 70%에 육박하는 무서운 병이다. 범백 균이 침투하면 수일 내에 탈수가 되고 백혈구 수치가 완전히 파괴된다.
우리가 의아했던 것은 새끼 고양이를 데려오기 위해 예방접종과 검사를 다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었다는 거였다. 들어보니 너무 어린 고양이는 범백을 확인하는 키트에 잘 표시가 안된다고 한다. 더욱 망연해졌다. 동생의 좌절은 내가 심란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범백 균은 플라스틱에서 1년을 갈 만큼 무서운 바이러스다. 의사는 집에 있는 고양이를 위해 밥그릇과 캣타워, 화장실 등 질병에 노출된 고양이가 머무른 모든 물건을 버리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그곳을 락스로 닦아내야 한다고 했다. 동생 부부는 휴가를 내고 이틀 동안 집안 전체를 소독했다.
미소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병원비도 어마어마했다. 고양이가 무슨 중환자실에 입원하느냐고 주변 사람들은 웃었다. 나는 웃음이 안 났다. 며칠 전만 해도 건강하게 펄쩍거리던 씩씩한 녀석이었다. 8년 내내 내 조카였다. 남동생이 결혼해 아기를 낳았다고 내복이며 기저귀며 사다 나르기 바쁜 친구들을 보면서 내심 부러웠다. 내 동생 부부는 난임으로 임신을 포기한 상태다. 그래서 나 역시 그들이 키우는 고양이들에게 보통 이상의 애정을 갖고 있다. 짧은 다리 한쪽에 링거 바늘을 꽂고 어차피 탈수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평소에도 너무 싫어하는 넥카라를 쓰고 축 늘어진 미소의 사진을 봤을 때 울고 말았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우리 애들에게! 착한 일 했을 뿐인데, 왜!
그 고양이를 원망할 마음은 없는데 누나, 나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모르겠어.
8년 동안 늘 같이 있던 두 개의 밥그릇, 두 개의 쿠션, 미소가 늘 올라가 있던 타워에 미소가 없다는 게 날 미치게 해, 누나.
착한 마음으로 한 일인데 결과가 참혹하다. 자식처럼 함께 사는 고양이는 엄청난 내상을 입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분투 중이며 보험이 되지 않는 동물병원비는 상한가를 모르고 치솟는 중이다. 스스로 얼마나 후회가 될지 잘 안다.
좋은 마음으로 했던 모든 일이 어리석고 무의미 한 건 아니다. 그러나 상황 앞에서 사람은 다른 관념들까지 신경 쓸 겨를이 부족하다. 우환이나 불운일수록 더 그렇다. 꺼져가는 생명을 위해 돈과 정성을 들였다. 누구에게도 보상을 바란 적은 없었다. 종래에 우리는 고통받고 있다. 앞서 행한 일 때문에 자책하고 비관해 사랑하는 마음까지 원망할까 봐 더럭 겁이 났다. '그러게 왜 길고양이를 주워 와!' 솔직히 나도 이런 마음 들었다. 그렇지만 거기서부터 비난의 물꼬가 트일 것 같아서 내내 참았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책임을 운운해선 안된다. 하지만 살면서 많이도 그랬다. 탓만 하다가 아까운 시간을 흘려버리고 만다.
결론적으로 미소는 삼일째 중환자실에 있다. 다른 일에 정신 팔고 있다가 문득 휴대폰 메시지에 동생 이름이 뜰 때마다 너무 불안하다. 탈수는 잡았는데 백혈구 수치가 여전하단다. 그래도 희망적이다. 미소가 꼭 한 번 이 시기를 잘 지나 주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착한 마음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는 일이 없게 해 주면 좋겠다. 착한 마음이 시련을 가지고 왔더라는 이 경험이 이치인 걸로 굳어지지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