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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Dec 10. 2021

다행인 줄 아세요

어떤 사과와 어떤 감사

 퇴근길이었다. 퇴근이라고는 하지만 자유로워서 언제든 퇴근길일 수 있는 게 너무 좋다. 그날은 오후 두시쯤 퇴근이었으니 행복에 들떠 있었다. 배가 고팠고, 비가 와서 그런지 들깨 수제비가 먹고 싶었다. 인적이 드문 갓길에 정차를 하고 검색을 했다. 가까운 곳에 1인분만 포장되는 들깨 수제비가 없었다. 다시 집 쪽으로 더 가서 검색을 해보자 결정, 드디어 괜찮은 곳을 찾았다. 조금 더 빨리 정차하고 찾았으면 좋았을 걸 유턴을 해서 온 곳으로 좀 되돌아가야 했다. 고민은 식사만 늦출 뿐. 내비게이션에 상호를 입력하고 냅다 달려갔다. 왕복 6차선의 나름대로 큰길. 러시아워에는 꽉 막히는 도로지만 그때는 차가 거의 없었다. 말이 왕복 6차선이지 양 옆으로 주차가 돼있어서 4차선에 불과했다. 저만치 앞에는 초록 신호가 켜졌고, 내가 그 신호를 받으면 좀 더 빨리 수제비를 먹을 수 있을 거였다. 하지만 바로 앞 신호가 주황색 불이 되었다. 실망하며 가속페달에서 발을 뗐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검은색 경차 한 대가 거의 도로를 가로지르듯이 등장했다. 나는 너무 놀라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신호가 아니었으면 나는 엑셀레이터를 힘 있게 밟았을 것이다. 차도 별로 없겠다, 평소처럼 휘익 하고 달렸으면 다음 신호를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작은 보행신호가 있었고, 마침 그것이 켜지는 바람에 가속을 포기했던 것이다. 검은색 경차가 아니었더라면 내 차의 속도는 서서히 줄어들어 횡단보도 앞까지 왔을 때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안전하고 우아하게 정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차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나는 끼익 소리와 함께 간신히 멈춰 섰다. 조수석에 있던 내 가방과 쇼핑백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검은색 경차의 운전석은 내 차 조수석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내 차와 그 차는 정면과 측면을 제대로 충돌할 뻔한 것이다. 상대편 차주는 창문을 내렸고, 손을 번쩍 들고는 ‘미안, 미안’이라고 했다. 내 차 창문은 올려진 채였다. 그는 급히 내리고 내게 사괄 했지만 웃고 있었고, 입모양으로 분명히 ‘미안, 미안’이라고 말했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초로의 남성이었다. 내가 엄청나게 놀란 데에 비해 그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분명히 달려오는 내 차를 봤을 테고, 아마도 본인 차가 3차선에서 1차선으로 들어가는 동안 내 차가 속력을 줄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계산과는 달리 나는 그 차를 보지 못했고, 그 차는 정차 중 출발이라 주행 중인 내 차보다 속도가 빠를 리가 없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함박웃음으로 미안, 미안을 두 번 말하고 왼손을 번쩍 든 후에. 뒤차들이 밀려오기 전에 나도 차를 출발시켜야 했다. 창문을 내리고 운전을 왜 그 따위로 하느냐, 미안 미안이라니 내가 당신의 친구냐, 깜빡이는 어디에 있고, 3차선에서 1차선으로 왜 오느냐 한 두 마디라도 했어야 했나. 계속 계속 화가 났다. 주문 해 둔 들깨칼국수를 사기 위해 가게 앞에 주차를 마친 후 곤두박질친 가방을 주워서 탁탁 털면서도 화가 멈추질 않았다. 기실 그럴 수도 있는 일, 흔한 일인데 왜 이렇게 부당하다고 느끼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득 헛웃음이 났다. 아저씨 운 좋은 줄 아세요. 저처럼 운전 잘하는 사람이 마침 오고 있어서 내 물건은 다 떨어지고, 타이어는 더욱 닳았겠지만 그래도 별다른 사고 없이 무사히 집으로 가셨잖아요. 


 그러다가 생각한다. 운이 좋은 건 나도 마찬가지 아닌가? 검은색 경차는 못 봤어도 빨간 불이 되어버린 신호는 보았고, 정기적으로 차를 점검해 둔 덕에 브레이크도 잘 잡아졌고, 물건이야 쏟아졌지만 주우면 그만이고, 그 차가 천천히 나와 준 덕에 아무튼 안 박았으니까. 더불어 20년이 다 돼가는 운전 실력 덕분에 어쨌든 사고는 면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화가 좀 가라앉았다. 어차피 화를 낼 대상도 사라지고 없는 마당에 계속 화를 내봤자 나만 손해다. 박았으면 들깨수제비 가게에는 노쇼가 돼서 욕만 먹을 것이고 다쳤으면 평범한 내 일과일지라도 꼭 필요한 일들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며, 입원이라도 해야 하면 다 꼬일 스케줄은 어쩌겠는가. 게다가 아무리 그 사람이 잘못했다고 해도 도로교통법상 100% 과실을 매길 수 없으므로 나 역시 어떠한 손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들깨 수제비는 맛있었다. 가게로 들어서자 마침 포장이 완료됐다. 맛깔스러워 보이는 겉절이와 함께여서 기대가 됐다. 계산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아직까지 따뜻한 그것을 훌훌 불어 먹었다. 어쩌면 병원에서 맞았을지도 모를 식사가 아님에 감사하면서.

 그렇지만 다음엔 아저씨가 오만하지 않기를, 내려서 제대로 사과하기를 바란다. 어떠한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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