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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Aug 25. 2021

나는 왜 안 깨물어줘?

 15년 전 여름에 아들을 낳았다. 거침없이 울어재끼는 것 하며 새까맣게 돋아 오른 머리카락 하며 뽀얀 피부 하며 내가 인형을 낳았나 아기를 낳았나 싶을 정도로 모두 다 그냥 예쁜 아이를 낳았다. 배 안에 넣어뒀을 때는 움직임이 심상찮아서 나와서는 얼마나 드셀까 생각했지만 웬일인지 잠도 잘 자고 우유도 잘 먹었다. 모유 수유하는 게 소원이었지만 신체적 결함 때문에 직접 물리지 못하였다. 소젖 먹고 크면 성질 사납다고 엄마 젖을 꼭 먹이라더니 수유가 잘 안돼 낑낑 대니까 애 배곯는다고 분유 쉭쉭 타서 먹이던 우리 할머니 때문에 더 못 먹였다. 직접 젖을 물리지 못한 것 빼고는 언제나 어화둥둥이었다. 얼마나 예뻐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딸을 낳았다. 동생이 없으면 외로울 것 같아서였다. 동생이 생기자 더 외로운 것 같았다. 겨우 네 살짜리인데 손발이 왜 이리 커 보이던지 네 살도 아기인데 빽빽 울어대는 작은 아이를 달래느라 큰 애는 늘 뒷전이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너무 빨리 , 많이 짜증을 섞어서 혼을 냈다. 아마 육아 스트레스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름 육아에 소질이 있다고 믿었지만 엄청난 산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도 같다.  둘째가 너무 울어서이기도 했다. 딸은 울음 끝이 길더라는 말에 철저히 동의한다.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딸은 잠도 잘 안 잤다. 젖을 물려서 재우거나 업고 재웠다. 낮잠은 숫제 땅에 내려놓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눕히면 깨니까 그냥 업고 재우는 거였다. 등이 반으로 쪼개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각고의 노력으로 눕혀서 재우기를 성공한 날도 있었다. 밤에는 낮보단 잘 잤다. 내 숨이 다 풀리기도 전에 이 때다 싶었는지 아들이 말을 걸었다.


 " 엄마, 보미 자?"


 야속한 보미는 오빠가 겨우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우엥 울어버렸다. 그러면 그때 그렇게 큰 애가 미웠다. 별로 넓지도 않은 등허리를 찰싹 때렸다.


 " 동생이 자는데 왜 말을 해? 조용히 하랬잖아."


 그때 아마도 난 경멸을 섞고 원망을 더해 무섭고 독한 표정으로 네 살 배기를 바라봤을 것이다. 벌겋게 뻣뻣해진 눈동자가 화끈거렸다.

하미는 아기 때부터 그렇게 순해 빠졌더니 그때도 그랬다. 엄마가 눈에 전에 없던 핏대를 세우고 고함을 지르면 그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저 쪽 구석으로 베개를 당기고 돌아누웠다. 엉엉 소리도 한 번 안 냈지만 어깨는 수없이 들썩였는데 계속 모른 척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딸아이는 거의 한 시간을 젖을 내놓아 물리고도 살짝 빼려고 하면 눈을 번쩍 뜨던 예민한 아이였다. 한쪽 옆으로 누워서 한쪽 젖이 당겨지듯 물려있으면 유방 위 쪽의 어깨까지 저리고 아팠다. 행여나 깨면 다시 물려야 하므로 애가 침을 흘릴 정도로 잠든 것 같을 때 진짜 어렵사리 젖을 빼냈다. 어떨 때는 옷도 못 내리고 조용히 천장을 향해 돌아누웠는데 등뼈가 우그러지는 느낌이 났다. 이를 꽉 물고 등뼈가 조금 펴지면 일어나서 밀린 집안일을 좀 해 놔야 했다. 몰래 일어나려고 땅을 짚은 손목에 힘을 팍 주는 순간 또,


 " 엄마 보미 자?"


 하루는 딸이 깨지도 않았는데 애를 들다시피 끌고 옆 방으로 들어가서 으름장을 놓았다.

 

 " 너! 동생 잘 때 엄마가 한마디도 하지 말랬지? 말하면 안 된다고. 애기 깨면 네가 책임질 거야?"


 생각해보면 참 못된 엄마였다. 딱 3년만 예뻐할 거면 3년을 몰아서 예뻐하지 말고 하루 이틀씩 떼서 6년을 예뻐할 걸 그랬다. 육아 스트레스를 모두 네 살 배기에게 풀 거면 동생은 낳지 말걸 그랬다. 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아들에겐 더 미안했다. 내리사랑인지, 정말 낳고 싶었던 딸을 낳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취향의 문제인 건지 이상하게 딸이 너무 예뻤다. 아들은 네 살짜리도 다 큰애 같더니,  딸은 6학년이 됐는데도 아직 어린애 같다.




 딸이 어릴 때부터 깨무는 시늉을 많이 했다. 궁둥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자꾸만 깨물고 싶었다. 딸이 네 살 땐가 그날도 엉덩이를 살짝 깨무니까 일곱 살 먹은 아들이 와서 자기도 동생 엉덩이를 깨물려고 했다. 깜짝 놀라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더니 엄마도 무는데 나는 왜 안되냐고 물었다. 아들이 일곱, 여덟 정도의 나이가 되니 예전보다는 한결 여유로워져서 보다 친절하게 설명했다.


 " 엄마는 동생이 예뻐서 그냥 무는 척만 하는 거야. 하미가 물면 동생은 너무 아프지."


그때도 착한 하미는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이고 장난감을 만지며 놀았다.

 

아들이 6학년이 되었다. 그때도 나는 여전히 아주 가끔씩 3학년씩이나 된 딸의 엉덩이를 물었다. 엄만 내가 아기인 줄 아냐며 핀잔을 주었지만 딸이 바닥에 엎드려서 그림을 그리거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몰래 다가가 깨무는 시늉을 했다.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귀여워서, 귀찮게 할 때의 반응이 재밌어서 종종 하던 일이었다.


 "엄마, 나도 엉덩이 깨물어줘. 왜 나는 안 해줘?"

 "뭐? 너는 너무 크잖아."

 "치, 엄마는 내가 작았을 때도 내 엉덩이 물어본 적 없으면서!"


 남들이 들으면 우스울 일이다. 저 엄마 이상하다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애 엉덩이를 왜 무냐고 욕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오빠가 동생 질투한다고, 6학년씩 돼서 모자란 것 아니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래 좋아. 일루 대. 내가 물어볼게."


 아들은 웃으면서 엉덩이를 들이댔다. 오, 진짜 물어보려고 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물어 줄 수가 없었다. 입에 들어가지도 않을뿐더러 청바지를 입었다고 해도 열세 살이나 먹은 아들의 엉덩이를 깨무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치, 그럴 줄 알았어. 못 무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물이 왈칵 났다.  나는 진작  애의 엉덩이를 물어주지 못했을까? 딸의 엉덩이를 수만   때마다 아들은 곁에 있었다.   번도 나도 물어달라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마도 '엄마는 동생만 예뻐한다.'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이상한 행동이 당하는 애는 싫었지만 선택받은 것이었고, 옆에 있는 애한테는 부러운 어떤 일이었다는 것을 아들이 열세 살이 돼서야 알았다.  다섯 살의 아들이, 일곱 살의 아들이,  살의 아들이 수도 없이 보내온 서운한 눈빛을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는 엉덩이를  물어줘도 괜찮은 나이가 됐고, 나는 절대로 엉덩이를 물어줄  없게 되었다. 아들은 이미 소년으로 자랐으니까. 아주 어릴  말고는 귀엽다고 깨물고 싶다고 말해준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기억은 너무도 오래돼서  이상 추억조차도   없을 테고, 동생이 귀여워서 어쩔  몰라하는 엄마의 잔혹한 미소만 각인이 돼서 어느  엄마가 생각 없이 하고 있는 깨물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되는  알면서도 자기도 물어달라고 처음으로 말했을 것이다.

후회가 밀려오지만 이미 늦었다.

단 한 번만 이전으로 돌아갈 시간이 된다면 십 년 전으로 돌아가서 이제는 방문 꽝 닫고 들어가 잘 나와보지도 않는 아들이 되기 전에 더 많이 안아주고 깨물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껄'은 늘 후회와 함께 온다고 말했던 어떤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네 살의 하미와 참 많이 닮은 사진이다

 사춘기인 아들이 나에게 갑자기 상처 주는 말을   나는 내가 주었던 상처를 고스란히 되받는구나 싶었던 적이 . 하루는 아들을 붙잡고 이야기했다. 미안하다고. 갑자기 미안하다고 건넨 인사에 아들은 대체  때문에 그러느냐며  화를 냈다. 어떤 날은 차근차근 설명한 적도 있지만 어떤 날은  말에 나도 욱해서 돌아서 버리기도 했다. 후회가 반드시 늦은 것만은 아니다. 서로에게 미안해하다 보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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