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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Dec 01. 2021

사춘기라서 그런 게 아니다

토요일이면 아들은 어디든 가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일주일  유일하게 허락된 '하루 종일 게임해도 되는 ' 이기 때문이다. 학교와 학원, 숙제 등의 해야  일들을 위해 평일에는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고 대신 토요일, 일요일에 실컷 하게  주는데 일요일은 교회를 가야 하기 때문에 오후 2시까지는 게임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들에게 토요일은 일주일을 살아가는 힘이자 무한한 기다림의 시간이  것이다. 어쩔  없는 날도 있다. 평일에는 엄마, 아빠가 일을 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는 토요일에 함께 식사를   있기 때문에 가끔 가족이 외식을 하는 날이면 싫어도 참석해야 한다.  입이 나온 채로 외출하지만 짬짬이 휴대폰으로 게임에 접속하기 때문에 싫다면서도 따라 나서는 아들이었다.  붙잡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건만 할아버지는  때마다 손자가 휴대폰만 잡고 있는 것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어느 토요일, 시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미가 너무 게임을 많이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이번 주부터 데리고 운동을 좀 할까 하는데. 1시에 나오너라."


"네, 아버지."


잘된 일이었다. 그냥 나오라면 나오질 않지만 배드민턴 같은 거라면 좋아했다. 시아버지는 건강을 위해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주 하는데 학교 운동장에 데려간 김에 그것도 가르쳐주시겠노라 했다. 엄마가 옆에서 얘기를 하든 말든 귀엔 헤드셋을 끼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는 아들 옆에서 눈치 봐가면서 설득을 했더랬다.


" 하미야, 다른 친구들은 할아버지랑 배드민턴 치는 애들을 거의 없다? 할아버지가 젊으시고 너를 엄청 사랑하시니까 바쁘신대도 일 빼고 배드민턴 치자고 하시는 거야. 알지? 게임만 하면 지루하니까 조금 치고 올까? 일찍 들어오자, 응?"


"저녁은 안 먹고 들어올 거야. 약속해."

"그래그래, 그럼 준비하자. 알았지?"


차로 40분 정도 되는 거리를 거침없이 달려갔다. 웬일인지 아들 녀석이 콧노래를 부르며 밖을 감상하고 있었다. 차 안에서도 당연히 휴대폰만 들여다볼 줄 알았는데 풍경을 감상하는 걸 보고 감동도 받았다. 둘 다 신나 있었다.


할아버지의 사무실에 도착한 아들은 비록 텔레비전을 틀기는 했지만 진득하니 기다렸다. 그날 사무실의 인테리어를 약간 바꾸는 중이어서 어수선했다. 빨리 가자는 하미의 말에 '할아버지 이것만 하고.'로 일관하는 시아버지를 보며 어딘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구 재배치는 거의 한 시간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3시가 되었다. 4시면 학생부 예배를 가야 하기 때문에 하미는 도저히 못 참겠다며 할아버지께 불편함을 토로했다. 그 와중에 손님이 온다는 전화가 왔다.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이래서 할아버지한테 안 오는 거야!



약속을 안 잡은만 못했다. 약속을 했으면 지키는 것을 몸소 보여줬어야 한다. 아직 14세 소년이라고 인정해주지 않고 예닐곱 살 어린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납득 안 되는 이유를 감정에 호소해 말한다고 설득당할 나이도, 시기도 아니란 사실을 왜 모르실까.


"아냐, 하미야. 할아버지가 나가려고 했어. 그런데 손님이 오신다잖아. 손님맞이 해야지. 하미가 이해해줘야지."


보다 못한 할머니가 나섰다. 애한테는 이해가 아니라 용서를 구하는 게 맞다고 당신의 남편을 향해 쓴소릴 한 후였다.


"하미야, 할머니랑 가자. 길만 건너면 학교 있어. 할머니도 치고 싶어. 같이 치자."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향해 눈을 흘겼고, 하미는 실망해서 어깨가 한껏 떨어진 채 밖으로 나갔다. 움찔한 할아버지는 라켓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손자의 뒷덜미에다가 이렇게 외쳤다.


"하고 있어. 할아버지 금방 갈게."


3시 55분에 땀인지 비인지 모르게 흠뻑 젖은 아들이 씩씩거리며 다시 들어왔다.


"내가 할아버지 그럴 줄 알았어. 안 올 줄 알았어."


기다리고 있으란 말도 하지 말걸 그랬다. 돌아오는 내내 아이는 시무룩했다. 나름대로 이해시켜보려고 했지만 잔소리로 밖에 안 들릴게 뻔했다. 그만큼 예민한 시기였다.




벌써 2년 6개월 전의 일이다. 하미와 할아버지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신도시에서의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시아버지의 사무실과 우리 집은 가까워졌고, 그래서 일부러 약속을 잡지 않아도 이웃집에 놀러 가듯이 오고 가게 됐다. 하미는 가끔씩 자전거를 타고 할아버지 사무실에 들러 간식도 얻어먹고 용돈도 받곤 한다. 할아버지는 불쑥 들어오는 하미를 반갑게 맞이하시고 하미도 할아버지를 불편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약속은 어떠한 것도 믿지 않는 눈치다. 사춘기는 10년을 간다는데 10년이 지나면 그 실망감도 사라질까? 아니, 정말 사춘기여서 예민한 걸까?


어른의 시간에 비해 아이의 시간은 기다려도,  단순해도,  버려져도 된다는 시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간혹 모든 청소년이 모든 상황에서 까칠함과 예민함을 속옷처럼 챙겨 입고 다닌다고 착각한다. 물론 사춘기는 매서운 바람이 감정선에 사정없이 불어닥쳐서 잔뜩 예민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예민함은 어른이 먼저 실수했을 때가 태반임을 인식해야 한다. '사춘기라서 그래'라는 말은 어느샌가 격언처럼 쓰이지만 사실은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폭력적인 말이다. 누구나 화나고 실망할  있는 상황에 나이를 끼워 맞출 필요가 없다. 그건 어른들이 편하자고 만들어 놓은 분류표 같은 것이다.


부모는 내가 아는  극심한 모순덩어리다.   듣는 아이들은 어쩌면 어른의 모순을 체념하고 사는 걸지도 모르겠다. 시아버지만 비난하잔  아니다. 기억은  나지만  역시도 그런 식으로 아이를 기다리게 하고 실망시킨 적이 많았을 것임을 고백한다. 흔히 효를 말하면서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으니 빨리 효도하라고 하지만 자식 역시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말이지 아이들은 너무 훌쩍 자라 버린다. 부모의 성장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후회를 뒤집어쓰고 아무리 울어도 돌아가지 못한다. 아이들의 예민과 우울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그게 부모의 약속 불이행 같은 실망스러운 모순에서 비롯된  아닐지 살펴봐야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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