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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Dec 06. 2021

꿀떡과 야구모자

스물넷에 엄마 되기

 지금은 아기를 낳아도 손님들이 직접 가서 축하를 건넬 수 없지만 각종 바이러스로부터 나름대로 안전했던 2006년에는 자유롭게 산후 조리원 방문이 가능했다. 나 역시 출산 즉시 얼굴이 띵띵 부어있었고, 들추면 바로 살이 보이는 병원복을 입고 있었지만 손님을 맞이했다. 여름인데 에어컨도 못 틀고 절절 끓는 방을 유지하는 입원실이었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어른들은 봉투부터 시작해 기저귀, 분유, 물티슈, 내복 일속을 선물로 가져왔다. 이제 돈 쓸 일만 남은 어린 부부에게는 천금 같은 십시일반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좀 달랐다. 남편 친구들은 거의 학생이거나 사회초년생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갑도 넉넉하지 않았고, 뭘 사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비슷한 또래의 지인이 아기를 낳은 건 우리가 최초였다. 재밌는 선물들이 이어졌다. 아이스크림, 팥빙수, 케이크와 도넛, 꿀떡과 초코파이도 있었다. 센스 있게 기저귀를 사 온 친구도 있었는데 신생아용을 사 오는 바람에 소형으로 바꾸러 가야 했다. (신생아용은 너무 작아서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 아기는 열흘도 사용하지 않았다)


 여름이라고 사온 빙과들은 당연히 산모에겐 금지 음식이었다. 아기를 낳으면 산모는 온몸의 뼈가 근육으로부터 이탈한 환자가 된다. 치아도 마찬가지. 찬 음식과 무리한 운동은 평생의 건강에 해가 된다. 그래서 산후조리라는 것을 한다. 얼음을 와그작 씹었다가는 치아가 모두 망가지고 말 것이다. 잇몸도.

 차갑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꿀떡은 다른 음식에 비해 딱딱하고 쫄깃하다. 잇몸에 무리가 갈 게 뻔하다. 게다가 단 음식은 수유에 최악이다.


 모유를 먹일 때 케이크나 도넛, 꿀떡처럼 달달한 음식은 유선을 막아서 안 먹는 게 좋다고 한다. 특히 나처럼 오케타니 수유 마사지를 10번이나 받은, 그야말로 모유가 부족한 엄마에게는 절대로 안 되는 음식이었다. 친구들이 알 리가 없지. 모르는 게 당연한데도 이상하게 섭섭했다. 친구들이 몰라서 서운한 게 아니라 나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괜스레 속상했다.


 게다가 남편도 처음에는 '네가 좋아하는 꿀떡 먹어 봐'라고 했지만 내가 고사하자 혼자 맛있다며 연신 입에 털어 넣었다. 아기는 같이 낳았는데 왜 나만 벌써 고생인가 싶어 괜히 툴툴 거리기도 했다.



 아기가 6개월이 넘자 출산 때 못 와본 경기도 친구들이 날 잡아 놀러 왔다. 아기는 이제 배밀이를 하고 있었다. 방송작가로 취업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입봉도 못한 내 친구들은 집에도 잘못 들어가면서 박봉에 시달리는 등 힘들게 일한다고 했다. 안쓰러운 눈빛을 연신 보내며 이야기를 들어주었지만 아기는 어느새 울었고, 안고 어르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아 화가 났다. 애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칭얼댈까 젖도 물려보고, 업어도 보았다. 곧 숨이 넘어갈 듯한 친구들의 꺄르륵 소리에 아이는 자려고 하다가도 눈을 반짝 떴고, 친구들의 이야기는 문지방을 넘어 아기의 귀를 강타했지만 내게선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방송국이 좋은 점, 못되게 구는 선배 작가, 작업하다가 만난 동기나 후배들 이야기에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관심 없는 것 같았다. 서운함이 슬슬 밀려왔다.


 그런데도 졸음에 못 이겨 아기는 손을 빨며 잠이 들었다. 얼굴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어서 코끝이 찡했다. 친구들이 여전히 떠들고 있었기 때문에 행여 내려놓다가 깰까 봐 업고 있었는데 친구들이 사 온 선물이 안방 화장대 위에 있는 게 보였다. “고마워” 하며 받아놓고 제대로 열어보지도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열어보았다. 초록색 야구모자였다. 미국 야구팀 엠블럼이 모자 앞에 박힌, 모자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메이커의 모자였다. 예뻤다. 하지만 우리 애는 6개월이었다. 6개월은 거의 누워만 있는데 야구모자라니. 심지어 그 매장은 베이비라인이 없다. 친구들이 사 온 모자를 우리 애가 쓰려면 3년은 족히 있어야 할 것 같았다. 3년이면 모자는 맞겠지만 나는 친구들보다 훨씬 늙은 채로 아이만 기르는 아줌마가 돼 있을 거란 생각이 미치자 짜증인지 울화인지 모를 것이 목울대로 컥하고 밀려들었다.

 

 “얘들아, 이제 애 자야 할 것 같아. 열이 좀 있나 봐. 이제 그만 가.”

 “아, 정말? 알았어. 근데 버스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았는데? 네가 저녁 먹고 가래서 8시로 예매했는데”

 “미안해. 수영이랑 나가서 먹어. 다음에 내가 사줄게.”


  아마도 친구들은 나가면서  욕을 엄청 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나랑 친하게 지내는 것을 보니 이해하고 돌아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땐 원망뿐이었다.   앞의 문제에만 함몰된  억울하다고 칭얼댔다. 아이가 말썽을 피우거나 잘못을 해서 혼을 내야  때면 ‘어린 나이에  하나 포기 않겠다고 결혼을 해서...’ 시작했다. 아이는 태어난 것을 죄스러워하면서 살았다. 꿀떡과 야구모자는 그저 선물이었는데 나는 온갖 우울과 불평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사이 아이는 금화를 도둑맞은 나그네 같이 망연하게 앉아 죄도 없이 벌을 받아야 했다. 아이가 헛것을 볼만큼 아프고 나서야 그게  때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것은 너무도 오래 걸렸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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