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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박 Feb 23. 2022

자유롭게 라면 먹을 권리를 달라고?

엄마의 식탁은 변한다

아이가 밥을 잘 먹지 않을 때 엄마는 괴롭다. 큰 애가 네 살 땐가 너무 안 먹어서 병원에 데리고 가니 한약이라도 지어서 먹이란다. 양약을 처방해 조제받게 하는 소아과에서 그렇게 말하다니. 제법 비싼 값을 치르고 약을 지어 왔지만 아이의 식욕은 생겨나질 않았다. 어떻게든 좋아하는 걸 먹여볼까 싶어 매일 고민하며 장을 보았다. 달콤한 걸 섞어서 주어도 몇 입 먹으면 멀찌감치 물러나는 아이를 보면서 다른 가족들은 굶기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기다리고 기다려서 얼추 먹도록 만들었다. 입에 내내 물고 있으면 물을 먹이고 까르르 웃기고 무서운 얼굴로 엄포도 놓아보면서. 친정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혀를 찼다.


냉정하게 굶기라고? 굶는다고 먹을 아이였으면 애초에 음식을 거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밥이 먹고 싶지 않은 걸, 식욕이 당기질 않는 걸 저라고 어쩌겠는가. 나는 숟가락을 들고 아이를 쫓아다니면서, 그 숟가락이 비행기라며 위우웅- 소리를 내면서 음식을 아이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게 열 살이 되었다.


이전에 누가 밥상을 거부했는가 싶게 초등 고학년이 되자 아들의 식욕은 폭발했다. 키가 크려고 그러는지 어른 밥만큼의 양을 해치우고 삼겹살이나 두루치기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이라면   그릇도 거뜬히 비웠다. 살은 쪘지만 몸이 전체적으로 둥글어진  제외하고는 비만까지는 아니어서,   먹으니 너무 예뻐서 내버려 두었다. 2 때까지 엄청 먹더니 어느 순간 양이 줄고 살이 빠지면서 키도 자랐다.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고마웠다. 좋아하는  뭐든 해주려고 했다. 라면만 빼고 말이다.


우리 집에는 규칙이 있는데 라면은 일주일에 한 번 만이었다. 사실 밀가루와 나트륨 덩어리인 라면이 성장기 아이들의 건강을 해치는 건 누구나 안다. 이렇게라도 정해두지 않으면 너무 먹으려고 드니까 나름의 강수를 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짜장면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가락국수도 먹으면서 라면에 필적하는 밀가루를 꾸준히 흡수해 왔다. 과자나 빵은 어떻고. 캠핑 같은 갑작스러운 행사에도 라면과 비빔면이 물색없이 동반되기도 했다. 먹는 날이 아닌데도 라면을 끓여달라고 조를 때 아이들과 나는 가끔 다퉜고, 대부분은 나의 승리로 끝났다. 그렇지만 또 마음이 흔들려서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엔 끓여주었다. 정해진 요일은 점점 앞당겨졌다.


얼마 전엔 라면 때문에 오랜만에 다투었다. 보드게임을 해서 지는 사람이 다음날 아침 차리기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더니 딸이 좋다면서 자기 오빠를 보고 '일부러 져서 아침에 우리 둘이 라면을 끓이자'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것은 벌칙이 아니라 너희들에겐 상이지 않냐며 이 내기를 없었던 것으로 하자고 했다. 아들은 펄쩍 뛰며 그런 게 어딨느냐고 하기로 했으면 하는 거지 왜 엄마 마음대로 바꾸느냐고 따졌다. '벌칙의 취지가 어긋나기 때문에 내기를 무효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지만 아들은 '엄마는 늘 엄마 마음대로만 한다'는 식의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대체 왜 라면을 자기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두지 않느냔다. 내 몸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도 했다.


내가 막아도 아들은 일주일에 두세 번 라면을 먹는다. 나와 약속한 공식적인 날 이외에도 친구를 만나 편의점에서 먹거나 친구네 집에 가서 끓여 먹는다. 대부분 눈치를 채지만 그냥 넘어가 주는 것은 그런 것까지 따지고 들어서 불화를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라면을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굉장히 안 좋기 때문에 정 그렇게 네 맘대로 먹고 싶으면 3년만 기다렸다가 (성장기를 다 보내고) 독립해서 먹으면 되지 않냐고 했더니 이제 엄마가 자기를 걸핏하면 쫓아내려고 한다며 으르렁거렸다. 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이런 말을 들어야 했는가.


자식이 떡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는 부모는 없다.*자식이 돌을 먹겠다는데 떡이나 돌이나 네 몸에 들어가는 것이니 대충 먹으라는 부모도 흔치 않을 것이다. 내 몸의 일부를 찢어 아이를 낳고 지금껏 아침 한번 굶긴 적 없었고, 남매라고 어찌나 닮았는지 둘 다 잘 안 먹어서 만든 음식 버리기 일쑤일지언정 좋아하는 반찬 한번 해 먹인다고 한두 시간 전부터 부산을 떨어서 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겨우 라면 때문에 나에게 모진 말을 쏟아내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주방을 고스란히 반납하고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요즘 자주 그랬다.


방학이라 더 붙어있어서 그렇다. 느지막이 일어나 '엄마 밥!' 할 때마다 뭘 해줘야 군말 없이 먹을지 몰라 머리를 쥐어뜯으면서도 나름대로 좋아하는 것으로 메뉴를 짜는데 너무도 자주 인스턴트만 찾으니 점점 더 울적했다.


남편은 그냥 먹게 두란다. 자기는 일곱 살 때부터 라면 끓여먹었다며 자주 쓰는 외로운 유년시절 레퍼토리를 읊어대길래 대화를 관뒀다. 정말 내가 유별난 걸까? 그럼 나는 왜 라면을 먹이지 않는 것에 집착할까? 라면 질리도록 먹어보라며 그저 두지 못하는 게 좋은 것만 주고 싶단 내 집착 때문인가 생각한다. 이제 클 만큼 컸으니 라면을 먹든 말든 신경을 딱 꺼야 하는 걸까?




내내 사그라들지 않는 속상함 때문에 아무도 없는 오후에 불 꺼진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을 손으로 쓸어 보니 새삼스럽다. 엄마로 산지 16년 동안 이 식탁만 사용한 것이 아니어서 물질에 대한 별다른 소회는 없지만 밥상이 식탁으로 변하는 여러 날 동안 내가 차려낸 수많은 회차의 끼니를 떠올린다. 어쩌면 나는 인정을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침잠 많은 내가 더 잘 수 있는 휴일에도 어김없이 일어나 건강한 밥상을 차리려고 애쓴 것은 사랑이고 헌신이었다. 친구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엄마 노릇 허투루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실천했던 모든 시간이었다. 이제는 라면쯤은 혼자 끓여먹을 테니 본인들의 식사에 자유를 달란 소릴 듣자마자 내 식탁이 모두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3분이면 끝날 것을 왜 그렇게 몇 시간씩 불리고 볶아가며 시간을 낭비했니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서였다.


실제로 라면은 육개장보다 나트륨이 적다고 한다. 면만 먹는 것이 안쓰러워서 꼭 밥을 말아먹으라고 했는데 그게 살찌는 지름길이라는 말도 어디선가 보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스로 단단하게 쌓아 올린 소신이나 믿음이 와르르 무너지는 걸 본 적이 꽤 있는데 라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여전히 내 식탁을 양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의 모든 시간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밥상으로는 괜찮은 엄마였다. 내가 뱉은 말대로 아이들은 곧 독립할 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자기 마음대로 먹으며 살 것이다. 바쁘면 거르기도 하고 나름의 미식을 찾기도 하면서. 완전한 이유가 생겨 내 식탁을 떠나면 특별한 날이나 명절쯤 되어야 나만의 식탁을 차릴 테지. 어쩌면 이런 걸로 옥신각신한 게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근데 왜 이렇게 코끝이 찡할까.


엄마의 식탁은 점점 쓸쓸해진다.





*마태복음 7:9 인용

*모든 사진 : 픽사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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