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이의 과거
'맥이(貊耳)는 악몽을 먹는다고 널리 알려졌지만, 그것은 맥의 이야기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런 설화가 퍼진 것이다. 일본에선 ‘바쿠’ 라고 불린다. 정작 한국의 설화에서 악몽을 먹는다는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하거나 찾아보기가 힘들다. 중국 쪽 설화로부터 전해져 온 맥이는 지혜를 나누어주고 인간들 곁에서 질병을 막아주고 해로운 것을 제거하며 생명을 소중히 하는 신성한 짐승이었다.'
맥이는 읽던 책을 덮었다. 보통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볼 설화 모음집이었지만 어린 시절 신수의 책임감으로 보냈던 이야기들을 보는 것은 마치 사춘기 시절 일기장을 들춰보는 기분이 들어 창피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중국에 있을걸. 별놈의 소문이 다 생겨….”
‘지금이라도 가지 그러나?’
“지금은 거기보다 여기가 살기 좋은 거 알잖아.”
‘자네 그러고 보니 여기에서 살게 된 이유가 뭐였나..’
“음. 그러고보니. 언제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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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태백산(太白山) 중턱. 맥이는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며 온몸 구석구석에 기운을 채워 넣었다. 여유가 있는 걸음걸이에 산 아래로 내려가 인간들이 제(祭)를 지내며 바치는 공물을 보러 가고 있었다. 내려가는 도중에 영물이라 불리는 산신 호랑이와의 인사도 하고 토지신인 구렁이와도 마주치며 영산(靈山)의 기운을 받으며 느긋하게 산책중이었다.
“어찌 이런 신산을 다 제것이라고 하며 다투는지 알지도 못 하는 것들이.”
“맥이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산신인 호랑이가 조심스레 다가와 맥이에게 물었다.
“천해영산을 두고 북방은 장백이라 부르고 남방은 백두라 부르고 같이 부르는 이름은 태백이라니. 지들 멋대로 해서 속이 답답해 그런다.”
“이제 두 발로 걸으며 예를 아는 것들이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산신 자네는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생각이 나보다 깊어 내가 오히려 자네한테 배우는게 많네.”
“부끄럽습니다. 저야 맥이 님보다 산 아래에 많이 다녀서 그런것일 뿐입니다.”
“간만에 공물이나 같이 보고 취해보지.”
산신과의 대화에 기분이 조금 풀린 맥이가 산 아래 도달하자 화려한 제단에 여러 음식이 하나 가득 놓여있었다. 영산에 기거하는 산신들을 위한 공물이었다.
“음? 게 누구냐?”
맥이의 한마디에 산신은 이빨을 드러냈고 곧바로 한 남자가 둘의 앞에 납작 엎드렸다.
“신(臣) 운영. 신수와 산신을 뵈 옵니다.”
“놈! 어디 인간 주제에 제를 마쳤으면 돌아갈 것이지.”
산신의 호통에 맥이는 진정하라며 운영에게 말을 걸었다.
“배포가 큰 놈이군? 그래 무슨 할 말이 있어. 왔는가?”
“이 비루한 몸에 감당키 힘든 능력을 받아 태백의 남쪽에 이변이 보인바, 나라님께 상소를 고했으나 허공에 흩어져 어찌할 방도를 몰라 이곳까지 왔나이다. ”
“응? 무슨 이변?”
“소인은 북방에서 우연히 감결(鑑訣)을 접하고 주제넘게 천기를 읽었나이다. 하오나 때가 늦어 이미 코앞으로 전란(戰亂)이 들이닥칠 시기인지라.”
운영의 말에 맥이가 소리를 질렀다.
“이놈! 감히 천기를 읽어 난세를 만들 셈이더냐!”
“하오나! 지금 이변을 막으려 움직이지 않는다면 영산의 북과 남이 모두 피로 물들고 영산마저 불에 타 사라질 것이 올진대!”
“보라. 현재 영산의 남쪽은 북쪽과 군신의 관계를 맺고 이리 좋게 살아가고 있거늘. 아직 나는 네놈이 말한 이변의 기운을 느끼지 못하였다.”
“하오면. 신수께서 바다 건너 왜는 살피셨나이까!”
“왜(倭)?”
“왜의 관백(關伯)이 영산을 삼키려 하나이다!”
운영의 이야기에 산신은 그르릉거리며 비웃듯이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영산 북쪽 땅이 원이라 불릴 때도 그러했고 명이라 불리는 지금도 그러하듯 어디 배 타고 노략질이나 일삼는 왜에서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냐!”
“하오나 감결에서 이르기를 용의 꼬리에서 불이 나 쉬이 끄지 않는다면 용의 아가리가 아닌 허리에서 불이 나온다. 하였습니다! 산신이고 신수이시면 영산 높은 곳에 올라 왜의 기운을 보심이 맞다 아룁니다.”
“아니라 하면 내 너를 뼈까지 씹어먹겠다!”
“예! 소인 미천한 몸뚱이 비루한 재주로 어설피 일러 본 천기에 잘못 보고 잘못 읽었다면 기꺼이 이 몸 조선의 팔도를 위해 버리겠나이다.”
맥이는 산신과 운영의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영산 꼭대기로 오르기로 하고선 바로 몸을 날렸다. 운영을 등에 태운 산신과 맥이 걸음을 옮기자 산자락에 짙은 안개가 드리우더니 이내 안개 속에 몸을 싣듯 바람보다 빠르게 정상을 향해갔다. 운영이 눈을 뜨자 영산의 꼭대기에 넓다란 호수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신령한 기운이 폭발할 듯 넘쳐흐르는 것을 느끼고는 잠시 휘청거렸다. 아마도 두 영물과 함께 자리에 있어 더욱이 기운을 크게 느껴 그랬는지 모른다.
“흠. 어디보자. 왜가 있는 쪽이 어느 쪽이더라.”
“경상의 끝자락 포항에서 2000리 밖입니다. ”
맥이는 잠시 발을 호수에 담그고 긴 코로 물을 퍼 눈에 바르더니 다시 자리에 올라 눈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무언가에 놀란 듯 고개를 운영에게 돌렸다.
“언제더냐!”
“감결을 보고 왜의 기운이 변함을 느끼고 임금께 전함이 백일 전이었습니다. 허나 김성일 부사의 말을 듣고서 임금께서는 왜의 경계를 접었나이다.”
맥이가 왜의 방향에서 본 기운은 끝없는 욕심과 살의가 뒤엉켜 마치 피와 같이 끈적하고 검붉은 그런 기운이었다.
“산신! 영산 남쪽의 토지 신들에게 전하게! 인간들을 북쪽으로 올리게 무엇이던 해야 하네.”
맥이의 이야기를 들은 산신은 힘찬 포효를 지르고서는 산 중턱으로 몸을 날리듯 내려갔다.
산신이 사라지고서 맥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잠시 후 운영을 코로 잡아 등에 태우고서는 영산의 호수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날아올라 조금 내려가 멈춰 섰다. 그곳은 종덕사라 쓰여있는 작은 현판이 기둥에 걸려있는 절의 터였다. 맥이가 문 앞에서 크르릉 거리듯 목 울림만으로 소리를 내자 안개가 생기며 왠 노승이 현판의 아래에서 걸어 나왔다.
“오랜만이구료. 맥이.”
“일이 급하여 내 선인을 찾는데 반겨주어 고맙소.”
“허허. 이제 서로 알 만큼 알 터인데 뭐 별거라고.”
“내 절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노승이 등선하는 것도 못 챙겨주어 미안함이 크오.”
“내 등선하고서 음험한 기운이 느껴져 맥이 자네가 올 줄 알고 있었네. 자. 받으시게.”
노승은 품에서 쌀로 만든 맥이의 모습을 딴 인형을 내밀었다.
“이건?”
“자네가 숨을 불어 넣으면 자네와 같이 움직여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걸세.”
맥이가 노승의 손에 든 인형에 깊게 들이마신 숨을 뱉어내자 쌀로 만든 인형이 점차 맥이와 같은 형상을 갖추며 꿈틀거렸다. 크기가 손 위에 올릴 만큼 작아서 그렇지. 영락없는 맥이의 형상 그대로였다.
“그래. 이놈은 무슨 능력을 가졌는가?”
“자네와 기본은 같네. 단지 쉽사리 죽지 않을 뿐이지.”
“그럼 이름은 불가살(不可殺)이라 지어야겠군.”
“허허. 불가살이 라 그거 그럴듯하군. 맥이. 이놈은 자네를 닮았으나 태생이 식(食)인지라 식탐이 많네. 자네와 같이 쇠를 섭식하며 커가며 난(亂)을 일으킬지 수호신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네.”
“성품이 곧은 자가 키워야 하겠군. 곧 영산 남쪽이 피에 젖을 테니.”
맥이는 말을 마치고 등에 업고 왔던 운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운영은 신령한 둘의 사이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공손히 불가살을 전해 받았다.
“이제 너는 불가살을 품고 평안에서부터 쇠를 먹여 키우며 황해를 거쳐 도읍으로 가거라.
그럼 도움이 될 정도로는 크겠지.”
“허허. 맥이 자네는 이 영산에서부터 그냥 보낼 터인가.”
노승이 웃으며 현판 쪽으로 손짓을 하자 안개를 뚫고 날개가 달린 커다란 구렁이가 꿈틀대며 나타났다.
“내가 거둔 이무기이네. 타고 가게나. 자네 곁에서 도움이 될 터이니. 그리고 내 자네의 품속에 십승지(十勝地)를 적어 놓았으니 백성들은 그리 안내하게나.”
운영은 이무기에게 다가가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이무기는 그런 운영의 몸을 또아리 틀듯 감싸고선 하늘로 오르기 시작했다.
“두 영신의 명을 모시어 감결을 틀겠나이다!”
운영의 외침이 곧바로 하늘에서 퍼져가며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다시 종덕사로 들어가 공양을 드리겠네. 맥이 자네는 어찌 할 텐가.”
노승의 말에 맥이는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박이며 대답을 했다.
“불가살이 클 동안 왜 에 다녀올까 하네.”
“허허허. 영산의 신수가 왜 라니. 알겠네. 내 자네를 위해 하늘에 고하여 보겠네.”
“부탁 좀 하겠네. 그럼.”
말을 마친 맥이가 커다란 몸으로 허공을 휘젓는 듯한 모양으로 구름 위로 사라져 갔다.
“아미타불.”
종덕사의 현판 아래로 노승이 들어가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화가 오갔던 장소에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돌밭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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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생각을 그리하나.’
“그냥 뭐 옛날 생각. 조용한 걸 보니 사고는 안 치나.”
‘누구 말인가.’
“있어. 나랑 영감 속 썩이는 놈 하나.”
맥이가 사무실 벽에 걸린 자신의 그림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