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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16. 2021

발화(發花)

무기력함은 한때 분노에 가렸다.

할 수 없다는 두려움과 더 낫지 않다는 수치심은

온몸을 누그러뜨렸다.


그렇게 똬리를 틀었다.


가끔 지나던 누군가가 나무 막대기로 찌르

머리를 들어 독니를 보였다.

그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막대기를 떨어뜨리고

서둘러 도망갔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슬펐다.

도망가지마, 가지마, 그냥 있어줘.


다시 여러 해가 지났다.


굴 속으로 들어가 가만히 있었다.

하루에 한 번, 굴 끝에 무심코 걸리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어쩌다 누군가가 굴 안으로 손전등을 비추며 말을 걸어왔지만 말하는 법을 잊은 탓에 말할 수 없었다.


세상은 늘 고요했다.

밤에는 조금 습했지만 견딜만했다.

낮으로 기울어진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창 밖의 모습을 상상했다.

태양을 더 가까이 보고 싶은 날이면 자세를 조금 바꿔보기도 했지만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리고 몸은 어느새 아주 차가워졌다.


체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눈이 감긴다.

들꽃이던 시절에 사람이 되고 싶었던

간절한 그 소망을 지금에 와서 다 망쳐버렸다.

잠이 쏟아진다. 꿈을 꾼다.

악몽일까.


숨 쉬기가 힘들어진다.

굳어 있는 몸을 움직여보려 여러 번 시도해봤지만

꼼짝하지 않는다.

깨지 않을 꿈이 다가오고 있었다.

창백하게 바르르 떨던 푸른 입술 위로

달빛이 떨어진다.


할 수 있었는데

잘하는 게 있었는데

그렇게 해야 했는데

살아야 했는데

기울어진 머리칼이 하늘로 쏟아진다.

뜨거운 태양이 얼굴을 덮는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두 손이 두 볼을 어루만진다.

축 늘어진 몸을 힘껏 안은 그대가 느껴진다.

온기가 느껴진다. 익숙한 온기가.

따뜻한 그대가.


그대의 등을 타고 부서진 굴 밖으로 나와보니

세상은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고

햇볕은 너무도 강렬했다.

 눈 사이로 초록색 잎사귀들이 보였고

갈색으로 빛나는 나무가 반가웠다.

그리고 땀으로 젖은 그대의 이마와 등이 느껴졌다.

다시 눈물이 나왔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은 더 따뜻해졌다. 살만했다.

더 이상 견딘다거나 버틴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속으로 들어갔.

돌아오는 답변도 없이 손전등을 비추며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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