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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재 Dec 16. 2021

[단편소설] 뛰어다니는 세상

새로운 역사

  독일의 위대한 생물학자 겐나디 벤게로브가 아니었다면 인간들은 아직도 자동차, 오토바이, 기차 같은 것들을 타고 다니며 고작 90년 살기도 벅찬 일이라며 절망했을 것이다. 두 말할 필요 없이 자전거나 비행기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기계의 도움으로 이동할 때마다 겐나디 세포가 활성화해 수명이 매번 1주일씩 줄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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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김형철 선수가 보입니다!! 여러분 믿어지십니까아아!! 1시간 45분 50초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2km!! 과연 마의 1시간 50분을 깰 수 있을 것인지!!! 김형철 선수가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으로 들어섭니다!!! 기명처어어얽!!!!!"

한때 세 개의 심장으로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던 이영조 해설가가 거칠고 쉰 목소리로 고래고래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음향감독의 고막을 찢을 듯한 방송사고 수준의 괴성이었지만 음향감독을 포함한 전 국민은 반쯤 넋이 나간 채 김형철 선수의 독주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었다. 탈 것이 없어진 이후 인류가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는 역시 마라톤이었다.


 김형철 선수는 이미 35km 지점에서부터 데드 포인트였다. 처절하다 못해 슬퍼 보이는 그의 표정은  세계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오른쪽 햄스트링 핏줄 일부는 터질 대로 터져서 마치 활화산처럼 새빨간 피를 토해냈다. 아드레날린과 함께 뒷다리를 타고 종아리로 흘러내린 피는 이내 거침없는 속도로 튕겨나가 아스팔트 도로에 꽤 규칙적으로 박혔다. 장관이었다. 그리고 그건 신의 한 수였다. 출혈과 함께 전신에 가득 쌓여있던 젖산이 풀어지면서 오히려 다리는 좀 더 편안해졌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찌그러진 종잇장에 불과했지만 피니쉬가 가까워질수록, 사물놀이패의 경쾌한 꽹과리 소리와 수십만 관중의 환호 소리가 커질수록, 그의 팔과 다리는 신들린 듯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더더더더!! 달려! 형철이 혀엉!!!" TV 생중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동혁은 갑자기 울린 알람 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오전 11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집에서 대략 20km 정도 떨어진 회사에서 교대근무 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던 그에게 남은 출근시간은 고작 2시간 남짓이었다. '아씨..출근해야지..' 역사적인 명장면을 포기해야 하는 아쉬움에 대뜸 짜증이 난 그는 와불 같이 굳어 있는 몸을 거칠게 일으키며 소파를 박차고 일어섰다.

  휴머노이드설치되어 있는 집 치고는 너무 지저분했는데, 언젠가 걸리적거린다며 로봇의 전원을 끄고 까맣게 잊은 것이 원인이었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거실은 그의 기억을 되살리려고 발버둥 치듯 그의 발바닥을 새까맣게 칠했지만 발을 따라 옷방으로 들어온  먼지들은 이윽고 하얀 스포츠 양말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옷 뭉치헤집고 간신히 닝복으로 갈아입고는 서둘러 현관으로 걸어갔다. 퀴퀴한 낯빛이 보기 싫어 좀처럼 거울을 보지 않는 그였지만 문득 성남-톨게이트 부근에서 한창 계도 중일 거라는 그 여순경 생각에 신발장에 붙은 전신 거울을 흘끔 쳐다봤다.

  유행은 좀 지났지만 나노스프링 섬유로 만든 검은색 나이크 런닝화와 0.1%의 체온 변화도 허용하지 않는 머큐리 재질의 회색 런닝복, 그리고 출근길의 지루함을 달래줄 메타왓치까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차림이었지만 동혁은 오히려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출근 인파가 드문 시간이었지만 도로는 여전히 어딘가로 뛰어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가을 햇살이 내리쬐는 폴리우레탄 재질의 노면 위로 수많은 사람들의 땀방울이 고였다가 증발하기를 반복했다. 집에서 출발한 지 겨우 1분 만에 숨이 차기 시작한 동혁은 쏟아지는 햇살과 가을 더위에 연신 눈을 찌푸리며 내일은 꼭 쿨링-고글을 챙겨야겠다고 되뇌었다. 그리고 아까 보던 경기가 생각 나 헐레벌떡 왓치를 켰다. "김형철 선수가!!!! 새 역사를 썼습니다!!! 이건 기적! 기적이에요!!! 으아아!! 여러부우운!! 49분 52초!! 49분!! 1시간 49분 52초오!!!!" 메타왓치를 켜자마자 해설가의 괴성부터 들렸다. 순간 고막이 웅할 정도의 소음이었다. 동혁의 동공이 커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동시에 그의 주변 여기저기에서 뛰던 수많은 러너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김형철 선수가 이뤄낸 쾌거는 대한민국 러너들에게 고스란히 쾌감으로 전해졌다. 종전의 대히트를 기록한 박유진 감독의 '더 빨리, 더 멀리'를 제치고 오늘의 그 경기 영상이 넷플럭스에서 단숨에 전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약 만 명쯤 되는 인파가 정신없이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마치 너도나도 김형철 선수의 분신이 된 것처럼 극한에 도전하는 페이스로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보다는 오히려 무언가를 쫓아가는 눈빛으로 돌변한 군중들은 하나의 해일이 되어 동혁을 덮쳤다. 선천적인 평발이라 학창 시절 내내 런닝과목에서 D-를 면하지 못했던 동혁에게는 아주 버거운 속도였지만, 그조차도 오늘만큼은 사력을 다해 뛰어볼 용기가 샘솟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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