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색의 물감을 쏟으면 새로운 색으로 섞인다. 어떤 색깔이, 또 그림이 나올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건 그 형태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순전히 인간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
비선형적인 현실을 규칙적이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원인과 결과, 생각의 흐름, 시간의 방향, 물리.. 이런 것들은 사실 무질서하게 뒤엉킨 것들로부터 인간 특유의 해석을 거친 인지 재료에 지나지 않는다. 물감을 쏟은 자리, 어지럽게 섞여있는 혼돈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노을이 지는 아름다운 여름 언덕을 떠올리는 것과 같다. 세상은 규칙적이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오직 모든 존재가 우연하게 연속적으로 겹쳐있을 뿐 그것에 어떤 스토리나 의미가 담겨있지는 않다. 그래서 예술은 오만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만의 극치다.
시작과 끝, 발명과 문명, 공전과 자전 가운데 뇌는 오직 생존을 위해 버텨왔다. 인간은 더 나은 생존을 위해 자연을 더 많은 방법으로 해석해왔고 급기야 자연의 해석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순히 생각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재가 발휘되는 것이었고 조금 더 독창적인 해석을 위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점점 잊어가고 있다.
문득, 야심한 밤 위를 자전거로 힘없이 미끄러지던 시간에 이 모든 것들은, 심지어 나조차, 그저 형형색색의 물감들이 쏟아져 잠시 섞여 있는 상태는 아닌 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수많은 것들에게 규칙성과 의미를 부여하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더 이상 체력을 낭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뒤따랐다. 정말 바람이 될 수 있다면 미치도록 가벼운 시선으로 세상을 떠돌텐데. 그렇지 못할 아쉬움은 나를 다시 인간으로 밀어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