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얼마나 강하게 머리를 맞은 건지 정수리 부분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무엇으로 맞은 걸까. 남자는 머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현관문에 들어서며 신발끈을 풀고 있던 것까지만 기억이 났다.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그의 뺨 밑으로 새빨간 피가 흘러 지나가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10초 정도가 지나자 흐릿한 초점이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제 자리를 찾아왔다, 전날 시킨 배달음식의 플라스틱 용기가 그대로 식탁에 남아있는 것이 맨 처음 시야에 들어왔다. 남자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황 파악을 위해 일어나 주변을 살펴본다. 전원이 꺼져있는 TV, 소파, 충전 중인 로봇청소기. 모든 것은 평상시와 똑같다.
쿵.
바닥을 가득 채운 붉은 피에 미끄러져 나뒹굴었다. 이 많은 피의 양은 자신의 피가 아니다. 이 정도의 피가 신체에서 빠져나갔다면 남자는 아마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 몽블랑 지갑이 진득한 붉은 피에 묻혀 갈색을 드러냈다. 남자는 허리를 굽혀 지갑을 집어 든다. 몇 장의 지폐. 신용카드엔 자신의 이름이 각인돼있다.
[KIM DO KYUNG]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강도라고 하기엔 지갑 속 내용물이 그대로 있다. 아니면 강도가 도망치는 과정에서 실수로 떨어트린 걸까. 대학 수업을 듣고 버스에 내려 집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다.
'엄마. 저 학교 다녀왔어요.'
그게 마지막 기억이다. 머리에 둔탁한 소리가 나고 코끝이 찌릿한 느낌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어졌다.
엄마는? 엄마는 어디 계시지?
도경은 집에 있는 문이란 문은 다 열어보기 시작했다. 이성적인 사고 회로는 정지됐고 피로 물든 거실 바닥을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에 평상심이 없다.
안돼!
도경의 엄마는 안방 침대에 누워있다. 두 손을 배꼽에 포개 올려놓은 채로. 목화씨처럼 하얀 침대보에는 붉은 피가 퍼트리듯 물들어있다. 도경은 잠들듯이 누워있는 엄마에게로 다가간다. 피가 모두 빠져나간듯한 창백한 얼굴, 엄마의 배에서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 같다. 생명이 시작되는 곳에서 죽음이 피어났다. 살인범은 엄마의 배를 찌른 뒤 의도적으로 피가 모두 빠져나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도경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주방에 있던 도마 모서리로 도경의 정수리를 내려찍고 도망갔을 것이고. 당장 도경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도경의 등장은 예정에 없었던지 살인마는 도망치듯 이곳을 빠져나갔을 확률이 크다. 피로 물든 거실 바닥에는 도경의 발자국 외에 다른 누군가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다. 신상 수제 브랜드 운동화. 도경에겐 그 브랜드의 신발은 없다. 대학에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고 있는 도경은 지금의 사태를 파악해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사망 경과 시각을 판단하는 것은 수사에 중요한 부분이다. 근육의 경직 상태, 망막, 시반,
위 내용물의 소화 상태 등 사체의 부패 상태는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를 말해줬다. 이 정도 피의 양, 각막의 혼탁 정도를 봤을 때 엄마는 10시간 내외로 살인을 당한 것이 분명했다.
'불쌍한 우리 엄마...'
누가 그의 엄마를 죽인 걸까? 왜? 금전문제? 원한? 하지만 원한이나 금전문제에 의한 살인이라고 보기에는 현장은 너무 깔끔했다. 이 살인범은 마치 자신만의 시그널을 알리려는 듯 시체를 침대에 고스란히 올려놓았다. 그리고 피가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피해자를 바라보며 자신의 우월함에 도취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살인마들은 살인 행위가 1회성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연쇄 살인' FBI는 연쇄살인을 다음고 같이 정의했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냉각기를 둔 채 세 곳 이상에서 세 차례 이상 살인을 저지를 것
이 살인마가 연쇄 살인범이기를 그는 기도했다. 눈물 조차 흐르지 않았다. 도경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 사람을 잡아 죽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방법으로...
도경은 엄마가 누워있는 침대 끝쪽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신고는 해야겠지. 대학 강의실에서 "수사"과목 살인사건 강의를 들으면서 내 가족이 살해당하면 똑같이 복수하리라 상상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이 상황이 현실인지 상상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았다. 나름 주변을 둘러보며 상상에서 처럼 범죄현장을 분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현실이다. 그제야 경직된 뇌의 근육이 풀어지고 이 상황이 현실로 다가왔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짐승 소리를 내며 오열했다.
"경찰서죠...? 엄마가... 살해당했어요..."
"1"..."1"..."2"
경찰서에 전화를 걸고 힘없이 현관문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경이 처음 정신을 차린 곳. 멍하니 이곳에 앉아 경찰이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다.입이 꼬인다. 최대한 발음을 똑바로 하려고 힘을주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생소할 따름이다.
아악!
갑자기 오른쪽 귀에서 강한 통증이 밀려왔다. 뭔가 이상했다. 그는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급하게 습기 찬 거울을 맨손으로 닦은 다음 거울에 비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있어야 할 곳에 있던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