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
퇴근한 당신의 손엔 검은 비닐봉지가 들려있다. 막걸리 두병이 좁은 듯 아옹다옹 서로 기대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보자 난 왜 갑자기 울컥했을까.
당신과 함께한 12년. 몇 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당신과 나와의 시간이었다.
한때 집안사가 복잡하여 결혼을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었다. 겉으론 자발적 비혼이라고 우겼지만 결국은 비자발적 비혼이었다. 그러다 사이버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재학생을 대상으로 한 무료상담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수개월간 일주일에 한 번 왕복 3시간 거리를 오가며 상담을 받았다. 나는 부모의 이혼으로 깨어진 가정을 부정하고 결혼에 희망이 없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결혼을 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깨달았다. 서른이 넘어서야, 상처뿐인 나도 봄 바다의 반짝이는 윤슬처럼 아름다울 수 있음을 배웠다.
결혼 전 살던 낡아빠지고 지긋지긋한 월세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를 만나도 편하지 않았던 삼십 대를 보냈다. 친구였던 당신을 남자로 보기로 결심한 것은 다분히 소박한 나의 속물근성 때문이었다. 직장상사에게서 샀다던 당신의 하얀 중고 NF소타나 조수석에 앉을 사람이 영원히 나이길 바랐다. 쌈짓돈으로 1억이나 모아두었다고 다른 동창이 귀띔해준 사실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든든했다.
잘 살다가 쫄딱 망해본 사람은 가난을 더욱 뼛속 깊숙하게 느낀다. 결혼이 가난의 탈출구가 돼서는 안 되지만 나에게 딱히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넓고 번잡한 역삼역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자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나와 연애만 하고 싶다던 당신의 바람과 달리 우리에게 갑자기 첫째 아이가 찾아왔다. 결혼 생각도 없는 당신이 내게 완전히 코가 꿰어버린 것이다. 하나하나씩 나오는 아찔한 고백에, 당신은 나를 양파 같다고 하였다. 다 허물어져가는 우리 집에 처음 데리고 간 날, 내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지만 당신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또 우리 엄마가 무당이라고 해도 눈 하나 꿈쩍 안 했다. 오래 직장생활을 끝에 모아놓은 돈이 겨우 이천만 원뿐이었어도 그저 알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당신과 나는 결혼이란 걸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나의 깊고도 복잡한 콩가루 집안 가정사를 듣고도 함구한, 첫 남자였다. 나에게는 그저 구원이자 운명이었다.
우리는 결혼을 하고 참 치열하게 살았다. 가진 것은 별로 없었고 바로 아이가 생겼지만 누구 하나 도움을 줄 사람은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십 년 간 다닌 직장에서 결혼하고 첫째 아이를 기관에 맡기며 칠 년을 더해 일했다. 일과 육아, 갈래 길에서 균형을 찾지 못하고 늘 뒤뚱거렸다. 퇴근 후 가면 어린이집에서 늘 혼자 기다리던 큰 아이가 눈에 아른거렸다. 하루도 지하철 환승구간을 뛰지 않은 날이 없었다.
당신의 매일 같이 반복되는 야근과 철야로 큰 애의 유년기에 아빠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피곤에 절은 몸으로 주말엔 방바닥에 종일 붙어있어야 하는 당신이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나는 원망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묵묵히 직장에 다녔다. 깊은 밤까지 아이 이유식을 만들고, 늘 쓸고 닦는 게 취미 인양 코딱지만 한 신혼 첫 집을 닦고 또 닦으며 그 시간을 견뎠다.
결혼하고 셋집에서 내리 두 번을 쫓겨났다. 전세살이는 못 하겠다며 집을 사자고 박박 우겼다. 결국 당신은 내 청을 들어주었다. 불어나는 눈 더미처럼 커다란 빚을 지고 집을 샀다. 내가 돈 열심히 벌어 빚 갚겠다고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그 말을 뱉어내고 몇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일을 관두겠다고 말했다. 더 일하다간 내가 죽겠다고 하자, 당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회사를 관둘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때부터 셋방살이는 면했을지 몰라도 쪼들리는 살림에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았다. 최악의 경우엔 새로 산 집을 팔면 된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육 년이란 시간을 버텨오고 있다.
퇴사 후 큰 아이와 오롯이 보낸 보석 같은 시간이 기진한 내 영혼의 양식이 되어주었다. 늦둥이로 선물 같은 둘째 아이도 우리에게 찾아왔다. 돈은 멀어져 갔지만 더없이 행복한 순간도 함께였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의 와이셔츠 겨드랑이가 땀으로 누렇게 물들고 양말에서 고린내가 나도록 나가서 일해온 덕분이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은 날이다.
난 성격이 급하고 매사에 안달복달하고 자로 잰 듯 계획을 하며 사는 사람이었다. 반면에 당신이란 사람은 세상 급할 게 없이 느긋하고 물 흐르듯 살아왔다. 이렇게 나와 너무 다른 사람이었기에 자주 당신을 몰아붙였다. 난 툭하면 당신을 하대하고 가사와 육아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핏대를 세우며 불평불만을 일삼았다. 그러나 당신은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늘 널을 뛰듯 사는 나와 살면서도 한결같은 당신이 좋았다. 이것이 모나고 이기적인 내가 당신과 지금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큰 아이가 대여섯 살이 되었을 때쯤, 더 이상 이대로의 내 삶을 견딜 수 없었다. 독서토론을 다니겠노라 당신에게 선언하였다. 주말마다 피곤한 당신이 큰애와 어떻게 시간을 보내는지 몰라도 그날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1시간 반 거리의 서울역을 오가며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았다. 당신이 군말 없이 주말을 포기하고 나를 위해 노력해주는 것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결혼하고 멈춰진 사이버대학의 졸업을 위해 공부하라고 늘 격려해주던, 끝내는 졸업을 하는 내게 축하한다며 멋들어진 외식을 시켜주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다.
돈도 안 되는 헛된 꿈을 좇는 나를 당신은 언제나 존중해주었다. 꿈은 소중한 거라며 그럴 때마다 엉덩이가 무거운 사람이 승리한다는 개똥철학을 내게 설파하였다. 박사가 되고 싶어도 학비가 없다고 투덜대면 그리 말해주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박사가 되지도 않은 나를 매력적인 황 박사라고 추켜세우고, 밤낮없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색시라고도 불러주었다.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다시 내 꿈을 찾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오늘도 노동을 하러 지난한 출근길에 나섰다. 그런 당신에게 나만 꿈을 찾아도 되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당신의 꿈은 저 멀리로 멀리로 자꾸만 가는데 나만 그래도 되겠느냐고. 그 말을 내뱉었던 날, 퇴근길 당신 손에 들려있던 막걸리 두병이 나는 그렇게 서글플 수가 없었다. 하루의 피로를 달래주는, 검은 비닐봉지 속의 초라하고 덜렁거리는 막걸리 두병이 꼭 보이지 않는 당신의 눈물과 같았다.
나의 꿈을 아는 당신은 어느 날 내게 핸드폰에 저장된 나의 이름을 보여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색시에서 세상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황작가라고 저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당신의 존재가 나를 더욱 쓰고 싶게 만든다. 늦은 꿈으로 때론 자신이 없어진다. 하지만 당신의 꿈을 유보하고 내게 먼저 내준 응원과 격려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털썩 앉아서 마시던 시큼털털한 막걸리 맛처럼 내내 익어가는 글을 짓고 싶다. 언젠간 나의 꿈과 더불어 당신의 꿈도 함께 익어갈 날을 기다려본다. 이제, 더 이상 막걸리 두병은 당신의 눈물이 아니다. 우리가 함께 나눠 마신 의리이자 뜨거운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