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룩 짭짭. 라면을 떠올리게 했다면 유감이다. 혹시 읽는 이가 한밤중에 글을 봤다면 석고대죄를 해야 판이다. 라면, 고것 참 끓이기도 쉽고 맛있는 음식이지만 내가 하려던 말은 애석하게도 먹는 라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가정법. ···라면, 에 대한 이야기이다. 살면서 수많은 달콤한 꿈을 꿔본다. 돈이 좀 더 많았더라면, 아이가 다 커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더라면, 부모가 더 잘났더라면, 얼굴과 몸매가 빼어났더라면. 요즘 내가 되었으면 하는 욕망의 꾸러미들이다. 나의 바람은 화수분처럼 끝도 없이 터져 나온다. 사실 이런 소원을 빌어보고 상상해본다는 건 꼭 나쁜 것이 아니다. 어느 정도 미래의 역동성을 끌어낼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 순간을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평생을 바라기만 하다 생을 마감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
큰 아이가 일곱 살 때부터 미술을 배웠다. 특별한 재능이 있다거나 미술을 딱히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시작은 아파트 앞 상가에 위치한 작은 미술학원에서였다. 상가라고 말하기도 무색하고 어정쩡한 건물에, 앞 유리가 투명하게 탁 트인 미술학원이 하나 있었다. 건너편 길가에는 안을 들여다보기 힘들게 나무틀로 막아놓은 또 다른 미술학원도 보였다. 아이에게 어떤 학원을 가고 싶은지 물었다. 아이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술학원을 택했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연이 육 년이란 시간을 통과하고 있다.
두해 전에 선생님은 재개발된 아파트가 완공되자 그곳으로 떠났다. 물론 미술학원도 함께 이전하게 되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본 것은 이 미술학원과 태권도 학원이 고작이었지만, 미술 선생님과의 인연이 보통을 넘어섰다. 아니, 선생님이 보통 분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선생님이 멀리 갔을 때 큰 아이는 매우 슬퍼하고 아쉬워했다. 더구나 둘째가 태어나고 이 년은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위험하다는 핑계로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며 살았다. 큰 아이를 둘째 아이와 더불어 집에 눌러 앉힌 채 두 해를 보냈다. 그나마 작년부터 큰 아이를 선생님 계신 학원으로 픽업해주기 시작하며 다시 미술수업이 시작되었다.
보통 회당 오십 분을 넘기기 어려운 수업을 선생님은 시간 외 수당도 받지 않고 툭하면 연장수업을 하곤 했다. 비가 오면 운치가 있어서 수업하다 말고 사진을 찍고, 벚꽃이 피면 카메라를 들이대며 아이들을 연신 담아냈다. 그러니 수업시간이 계속 늘어날 수밖에. 멀리 가지 않아도 상가 앞에서 손 흔드는 오색단풍을 보며 감탄을 내뱉곤 했다. 우리 아이의 생일파티와 크리스마스 파티가 학원 안에서 펼쳐졌다. 공모전에서 학원 아이들이 우르르 입상을 하면 그날도 잔치가 열렸다.
과자봉지를 열어젖히고 음료수 캔을 딴다. 학원 안 중심에 놓인 널찍한 테이블에 아이들의 웃음이 까르르 내려앉는다. 도도한 선생님이지만 이 날만큼은 얼굴에 화사함이 춤을 춘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가장 행복해하는 분이다. 예술을 하는 분이기에 선생님의 감정은 다소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베풀어주신다. 나는 선생님을 아이의 스승으로, 내 인생의 선배님으로 깍듯이 뫼시게 되었다.
내가 글을 쓰게 되었다고 말씀드렸다. 화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분이기에 창작활동에 대한 고초에 대해서도 깊은 이해와 공감을 건네주었다. 세상에 내놓은 근사한 작품 하나 없는 내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늦은 나이에 펼쳐낸 도전과 용기를 높이 산 것일 테다.
선생님은 목포 유지의 딸이었다. 부족함 없이 자라 미술의 재능을 알아차리고 일찌감치 예술학도의 길을 걸었다. 치열하고 격이 없이 살아온 나의 집안에 비해, 가진 것도 많고 누린 것이 많은 선생님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예술적 능력과 가치를 펼치는 데 있어서만큼은 선생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금전적인 바탕으로만 이뤄낼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도 아이들을 단순하게 학원생으로만 대하지 않았다. 인성과 가치관이 있는 아이로 자라도록 가르침을 주었다.
선생님의 젊은 시절 역시 내가 큰 아이를 키우며 일하는 엄마로 살아왔을 때처럼 치열함으로 가득 찼었다. 작은 신혼집 거실을 교실 삼아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대형학원으로 키워내어 원생이 백여 명에 달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선생님은 살림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이들의 먹거리는 늘 손수 마련하고 요리면 요리, 사업까지도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이 해냈다.
선생님의 회고를 듣고 있노라면, 숱하게 써온 나의 가정법들이 부끄러워진다. 글 쓸 시간이 부족하다며 아이를 다 키워낸 엄마들을 부러워했다. 이미 다 키워낸 여유만 바라보고 그들의 노고를 무시한 처사였다. 아이가 다 컸다면 더 많은 글을 써낼 수 있었을까. 선생님이 늦은 밤 작품에 몰두할 때면 남편이 다가와 한마디를 건넸다고 한다. 그만하고 내일 하지,라고. 선생님은 늘 물음에 대한 답이 한결같았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을 것이라고.
나의 글 스승은 돌쟁이 아기가 자장가를 불러달라는 청을 뿌리치고 책 마감으로 내달렸다고 고백한다. 공지영 작가도 젖을 잔뜩 배불리 먹여 아기를 부랴부랴 재우고 늦은 밤 글을 썼다고 전한다. 요즘 나의 글 짝지가 된 친구는 고만고만한 세 아이를 키우며 등에 아이를 매달고 휴대폰에 기록을 하고, 집안일을 하다 말고 노트를 꺼내 떠다니는 생각을 받아 적었다고 작가의 말에 쏟아낸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앉은 시간의 깊이를 나는 그간 ···라면,으로 외면해왔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내가 이런 글을 쓰면서 반성을 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그곳이 멀지 않다. 나의 글 짝지가 선물해준 나희덕 시인의 시집 <그곳이 멀지 않다>, 라는 시집을 펼친다. 나를 생각하며 떠올렸다던 ‘푸른 밤’의 마지막 글귀에 머문다. 모든 지름길을 돌아서 갈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에움길. 쉽사리 쭉 뻗은 길로 가려는 가정법을 떨쳐버리고 이제는 굽이굽이 휘어진 길을 선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