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영어울렁증 극복을 응원합니다

외국인과의 대화 Tip 전수

by 윤슬

오클랜드 남쪽 여행 중,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어느 저녁시간,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남편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큰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 마냥 눈과 입이 쳐져 있었다. 안색마저 창백해 보였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남편 옆에 다가가 앉으니,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어떻게 난 'I am fine thank you, and you?'도 안 나오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편이 설거지를 하던 중, 숙소 호스트 가족이 집에 도착했고, 그들은 남편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었다.

"Hey! How are you?"

여행 중 영어 담당은 나인데, 하필 그때 내가 씻느라 자리에 없었다. 남편은 당황하여 짧게 대답했다.

"Good."

'오늘 하루 잘 보냈나요?', '저녁은 먹었어요?' 등의 말을 하고 싶었는데, 머릿속이 하얘지며 아무 말도 안 떠올랐다고 한다. 호스트 가족과 남편 사이 2~3초간 정적이 흘렀고, 남편은 고개를 홱 돌려 설거지에 열중했다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또래들은 우리가 처음 배웠던 영어 문장을 기억할 것이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하우 아 유?" 하면 온 반 학생들이 입을 모아 "아임 파인 땡큐, 엔유?" 리듬을 타며 대답했다. 짝꿍끼리 돌아가며 묻고 답하기를 수차례 연습하였다. 그래서 외국인이 "How are you?" 하면 한국인은 상황에 상관없이 무조건 "I'm fine thank you, and you?"가 조건 반사로 나간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남편은, 실제 상황이 되었을 때, 한국인 전용 자동 대답 버튼조차 눌러지지 않더라는 것이다. 그는 "학창 시절 영어 성적이 나쁘진 않았는데, 학교에서 뭘 배운 것인지 모르겠다"며 한탄을 했다. 남편의 하소연을 미소 짓고 듣다가 20+n 년 전 일이 생각났다.


이탈리아로 교환학생을 갔던 때의 일이었다.

등교 첫날, OT 겸 학생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있었다. 대부분 이름과 국적, 학위 과정, 전공 등을 말하며 가볍게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 시간 나는 할 말을 속으로 되뇌느라 남들의 소개를 들을 정신이 없었다. 점차 내 차례가 다가오는데 심장이 떨리고, 머리가 하얘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발음이 안 좋아 못 알아들으면 어떡하나, 말하다 실수하면 어쩌지, 혹시 누군가 무슨 질문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 등등 온갖 걱정이 날 무겁게 짓눌렀다. 차례가 오기 3~4번째 전, 긴장과 압박을 견디지 못한 나는 결국 교실을 나와 화장실로 달렸다.


뚜껑을 내린 변기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마음이 진정되고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한국의 부모님이었다. '안녕, 나는 00이고, 한국에서 왔어. 경제학과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어. 만나서 반갑다.'이 말을 못 해 화장실에 숨은 딸의 모습을 보시면 우리 부모님 마음이 어떠려나. 스스로가 한심해 눈물이 났다.


현실적인 자각과 미래에 대한 걱정도 이어졌다.

'큰일 났다. 나 영어 못하는구나. 전혀 못 알아듣겠어. 입은 더 못 떼겠고. 어떡하면 좋아, 흑흑.'

'여기서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영어가 안되는데 수업은 어떻게 듣고, 친구는 어떻게 사귀어?'


그랬다. 외국에 나오기 전 난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다. 내가 영어를 꽤 하는 줄 알았다. 수능 영어 만점, 토익 900점 대, 토플 600점 대. 심지어 얼마 전까지 한 고등학생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었다. 이 정도면 영어는 통달했으니 다른 언어를 더 배우고 싶었다. 라틴어의 후예 이탈리아어를 배운 뒤 같은 로망스어군의 스페인어나 불어를 공부하여 몇 개 국어 가능자가 되리란 허황된 꿈을 품었다.


그러나 등교 첫날, 나는 무너져 내렸다.

자기소개를 못해 도망친 이는 전 세계에서 모인 30~40명의 교환학생 중 나밖에 없었다. 어찌나 창피하고 자괴감이 들던지, 그날 이후 진짜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남들은 놀고 왔다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학기를 울면서 공부했다. 절실하고 독하게.

그리고 그 결과는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내게 남게 되었다.


남편에게 나의 부끄러운 과거사를 들려주며, 외국인과 대화하는 노하우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영어를 잘하려 하지 마.

우리는 본능적으로 정답을 찾으려 해. 문법이 맞는지, 단어와 숙어가 적절한지, 발음이 괜찮은지. 신경 쓰는 게 너무 많아. 입을 열기도 전에 스스로를 채점하며 영어울렁증이 도지는 거지.


그런데 대화는 시험이 아니야. 단어 몇 개만 던져도 돼. 뜻이 통하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외국인과 말이 통하면 신이 날 것이고, 신이 나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어.


다음 단계는 다듬기야.

오늘 더듬거렸던 말의 자연스러운 표현법을 AI에게 물어봐. '아~이렇게 하는 거구나.' 깨달음이 오거나, '어머~이렇게 간단한 거였어?' 놀라기도 할 거야.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써먹기 단계야.

새롭게 익힌 표현을 20번 정도 소리 내서 따라 해 봐. 가능하면 24시간 내에 외운 문장을 실제 상황에 적용해 보는 거야.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지 않더라도 나를 연습 상대로 활용해."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에게 영어공부를 제안했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요즘은 핸드폰만 쥐면 영어 관련 유튜브를 보고, 새로 배운 표현을 메모장에 빼곡히 적어 놓고, 나를 붙잡고 영어를 연습한다. 그런 변화가 기분 좋아 나는 기꺼이 그의 선생님이자 연습 친구가 되어 다.


그 후, 외국인과 대화할 상황이 되면 나는 입을 닫고 남편에게 기회를 밀어준다. 그가 말이 막혀 당황해하면 옆에서 힌트만 살짝 알려준다. 우리끼리 있을 땐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외국인 앞에서 쫄지 마. 모국어가 아닌 말을 그만큼 하는 게 어디야. 잘하는 거야. 그리고, 여보 처음보다 많~~~ 이 늘었다. "


남편은 앞으로 10년간 하루에 한 문장씩 영어를 익히겠노라 선언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10년간 모인다면, 그는 50대 나이에 영어 능통자가 될 것이다.


10년 뒤 외국인이 남편에게 "Hey! How are you?"하고 인사를 건네면 남편은 뭐라고 하려나?

적어도 "Good." 한마디 하고 고개를 홱 돌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20+n 년 동안 영어 때문에 화장실에 숨는 일은 더 이상 없었듯이.


뉴질랜드 사진 중 나의 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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