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MBTI 검사 결과, 다른 성격은 중간 정도로 나오는데 유독 J-P에서는 많이 치우친 J(계획형)로 나온다.
맞다. 난 계획형 인간이다.
인생이 계획한 대로 될 거라 믿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삶이란 녀석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경험이 여러 번 있다. 다만 계획이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 엑셀에 계획을 짜고 숫자와 수식을 정교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내겐 취미이자 놀이이기도 하다.
직장생활을 하던 때, 입사 4~5년 차였으니 대리 1~2년 차쯤 되었으려나, 공기업의 정부경영평가 관리부서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결과에 따라 사장이 바뀔 수도, 전 직원 성과급이 달라지기도 하므로 대부분 공기업에서는 이 평가에 목을 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운다. 즉, 해당 업무 담당자는 최소 3개월에서 최장 6개월 매일 야근과 주말 근무가 당연지사였다.
어느 날 임원진에서 올해 평가 결과를 예상해 보라고 우리 부서에 지시를 내렸다. worst case, normal case, best case로 구분하여 케이스별 가정 및 달성 예상 확률을 나름 논리를 세워 제시하였다.
하나의 업무를 지시하였는데 케이스로 나누어 보고한 어린 후배가 팀장님과 임원들 보기에 똘똘해 보였나 보다. 칭찬 한마디 듣고 그 후 회사생활이 힘들어졌다. 힘든 부서 뒤에 기피 부서, 기피 부서 뒤에 헬 업무 담당자로 몇 년 동안 무지하게 쓰임 받았다.
그게 내 스타일이었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지 않고 맞이하면 낙하산 없이 수직 낙하하는 느낌이라 worst case를 늘 대비하는 성격.
퇴사 후 생활비 예산을 짜고 나니 인생 자금 계획까지 세우고 싶어졌다.
조건 : 40대 외벌이, 가진 건 서울 외곽의 집 한 채(+주담대 ㅠㅠ), 현금 약간
몇 날 며칠 엑셀을 이리 돌리고 저리 만졌다. 내가 갑자기 병을 얻어 더 이상 일할 수 없게 되었듯 남편도 60세까지 일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남편이 다음 달에 일을 그만두는 시나리오를 worst case로 가정했다.
◉ 인생 자금 계획_worst case
가정) 1. 부부 둘 다 더 이상 근로소득이 없다.
2. 국민연금이 고갈되지 않으며(plz~),
3. 연금과 아파트 가격은 적어도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여 동반 상승한다.
계산의 단순화를 위해 향후 수입과 비용 모두 인플레이션을 반영하지 않고 현재가치화하였다.
(-) 비용 : 월 250만 원 이하(주담대 갚는 조건), 년 3천만 원 이하 필요
(+) 수입 : 55세부터 퇴직연금과 주택연금, 65세부터 국민연금
A. 현재~55세 : 비용 3억 원+@ 발생
B. 55~65세 : 퇴직연금+주택연금으로 생활. 남는 수입은 개인연금상품에 투자.
C. 65세~ : 주택연금(혹은 주택 매도금)+국민연금으로 살기. 이 시기 늘어날 병원비를 반영하여 월 50만 원, 년 600만 원이 모자라다. B에서 준비한 개인연금을 보태어 생활하다 생활비가 부족한 시점이 오면 집을 팔아 매도금으로 노후를 보낸다.
B와 C는 얼추 안정되어 보이는데 A 시기의 필요 자금을 어떻게 만들지?
부부 둘 다 일을 안 한다 가정했으니 가진 것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집을 전세 주고 우리는 월세로 살면서, 전세금은 배당주에 투자하여 배당금을 받는 거다!
지방의 작은 집에서 살면 주거비 포함 월 300만 원 선으로 살 수 있지 않으려나? 튀르키예나 조지아 혹은 동남아에서 살면 250만 원 이하로도 충분해 보였다. 미국 고배당 ETF나 한국 금융 배당주에 투자한다면 얼추 가능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일을 그만두더라도 우리 두 사람 살아갈 방도는 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안정되었다.
파이어족들에겐 익숙한, 4% 법칙*, 25배 법칙**에서 말하는 자금을 준비하지 못했어도 한국에는 전세라는 시스템이 있다.
* 4% 법칙, **25배 법칙 : 연간 생활비의 25배를 모아 은퇴, 채권과 주식에 투자하고 매년 4%씩 인출하면 원금을 잃지 않고 투자수익만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다고 한다. 즉, 은퇴 자금으로, 살 집+연간 생활비 25배의 투자금이 필요하다는 법칙.
나처럼 가진 게 집 한 채라면, 자가로 사는 대신 월세로 살며 전세자금으로 비교적 안전한 투자를 하는 방법도 있다. 월세(+부동산 수수료, 이사비)와 예상 투자수익을 비교해 보고 더 나은 결정을 하면 된다. 물론 거주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잦은 이사의 번거로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오, 좋은데! 했다가 전세자금 반환 시점 경기 침체 등의 이유로 투자금이 원금보다 적으면 어쩌지? 또 다른 걱정이 고개를 쳐든다. 어쩌긴 뭘 어째! 전세자금 반환 대출받아 임차인 전세금 드리고, 두 사람 다시 일하며 대출 갚는 거지. 하여튼 걱정이 끝이 없다.
게다가 이건 worst case였다. 남편도 나도 앞으로 일은 하나도 안 할 거야, 노동 수입은 절대로 만들지 않을 거야는 아니지 아니한가!
됐다.
돈 걱정은 이쯤하고 이제 나의 이른 은퇴를 즐겨보자. 비록 비자발적 퇴사였을지라도.
열심을 다했던 과거의 내가 중년의 게으름을 선물했구나 싶어 2~30대의 내게 고마워졌다.
흐흐흐. 마음이 놓이니 그제야 웃음이 나온다.
웃다가 왠지 조만간 남편에게 퇴사를 권할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