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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8. 2024

다 팔고 다 버리고 떠나던 날

 다행이다. 11월에 집을 보고 간 젊은 부부가 우리 집을 계약하겠다고 했다. 전세금은 3천만 원 낮추고, 계약금은 통상적인 10%가 아니라 5%로 줄이고, 이사날짜는 임차인이 정하는 조건이다. 

     

 갑질 논란이 사회적 이슈가 된 이후 계약서에서 ‘갑, 을, 정’ 따위의 표현은 사라졌지만, 씁쓸한 추억이 된 이 표현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임대인은 갑, 임차인은 을이라는 공식은 옳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건 더 간절한 자가 을이다. 따라서 부동산 성수기에는 임대인이, 비수기 때는 임차인이 갑이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보다는 확정된 손실이 낫기에, 기쁜 마음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덕분에 우리 부부의 갭이어, 조금 늦어졌지만 떠날 수 있게 되었다.     


 2년 간 여행자의 삶을 살기 위해 모든 짐을 정리해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겨울 외투 몇 개와 앨범 정도는 시댁에 맡기기로 하고, 사진 정리부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앨범을 여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운 엄마의 글씨체

 교편생활을 하셨던 엄마는 방학 때마다 자녀들의 앨범을 정리해 주셨다. 색종이를 오리고 카드를 자르고 짤막하게 멘트까지 달아 예쁘게 만들어 준 앨범인데, 너무 오래되어 버려야 했다.  

    

 엄마를 대신하여 우주와 같은 사랑으로 날 키워주셨던 외할머니. 

 사진 속 외할머니가 너무 젊어서, 그 젊음과 청춘을 자식에 이어 손주에게 다 바치셨구나 싶어 또 한 번 울컥했다.

 

몇 년 후면 아기는 사진 속 할머니 나이가 된다. 나로선 엄두도 안나는 일들을 해내신 위대한 그분들.


감사하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여 드리고 싶은데 외할머니도, 엄마도 이젠 이곳에 안 계신다.      


 7살 때 여동생이, 13살에는 남동생이 태어났다. 어린 동생들이 생기며, 어느새 난 사진마다 동생을 안고 있었다. 당시에 난 다 컸다고 생각하며 당연한 듯 동생을 돌보았는데 지금 보니 사진 속 내가 너무 어려 마음이 짠했다. 너무 이르게 다 큰 애 취급을 받으며, 너무 빨리 철들어버렸던 나의 학창 시절.     


일주일 간 사진 정리를 하며 3~400여 장의 사진을 버렸다. 사진 정리를 하며 여러 번 웃고 울었다. 

그립고, 감사하고, 안쓰럽고 너무해서. 울컥, 히히, 왈칵, 깔깔. 


사진 정리가 원래 이렇게 감정 소모가 큰일이던가. 정리가 끝나자 몸살이 오기도 했다. 사진을 버리며 감정도 일부 정리가 되었는지 몸살을 털고 일어나니 마음도 가벼워진 게 신기했다.

     



 쓸만한 물건들을 중고거래 앱을 통해 팔고 나누었다. 쓰던 걸 뭔 돈을 받나 싶어 무료 나눔부터 1천 원, 3천 원, 5천 원에 대대적으로 올려두니 연락이 쏟아졌다. 일일이 대답하고 약속 잡느라 몸이 바빠 혼났다. 보다 못한 남편의 “1만 원 이하 책정할 상품은 팔지 말고, 모아서 나눔 하자.”는 제안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중고 거래로 약 100~150만 원의 수입이 생겼다. 냉장고를 포함하여 많은 것을 무료로 나누었지만, 작은 것들이 모이니 꽤 되었다.     


 이사를 며칠 앞두고, 더 이상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이불, 옷, 신발을 헌 옷 수거업체를 불러 팔아 32,000원을 받았다. 커다란 봉투 몇 개와 손에 쥔 만 원짜리 3장과 천 원짜리 2장을 바꾸었다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사 전 마지막 주, 75리터짜리 쓰레기봉투 7개를 추가로 꽉 채우고서야 집이 비워졌다. 저 많은 것들이 진짜 다 필요했던 걸까. 내가 비워 낸 물건 중 필수품과 허세의 비중은 얼마나 되었을지 반성하게 되었다.     


 줄이고 줄인 우리 부부 살림살이      

최선을 다했다.


 캐리어 하나와 백팩 하나씩 메고 떠나려 했지만 상상 속 모습과 현실 사이엔 괴리감이 있는 법이다. 

1년 동안 국내 여행하며 짐을 더 정리하여 해외로 떠나는 2년 차에는 진짜 가볍게 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떠나던 날 아침, 텅 빈 집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7번의 이사 끝에, 이사 때마다 몸살로 앓아눕는 게 너무 힘들어 영끌(>.<) 구입했던 첫 자가주택. 진짜 열심히 쓸고 닦고 만져가며 지냈다. 이 집에서 나의 건강도 많이 회복했고 두 사람 사이좋게 잘 지냈으니 참 고맙다. “고마웠어” 인사를 하고 현관문을 닫고 섭섭함 반, 설렘 반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고마웠어!

 나의 N번째 인생의 첫날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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