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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Mar 21. 2024

나는 또 신을 웃겼다

파이어족 부부 여행 준비 에피소드  

 망했다. 11월이다. 

 나와 남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빠졌다. 인생 후반부를 시작하기 전, 2년간의 갭이어즈(Gap years)이자 하프 타임을 가지기로 의견을 맞추고 여행 준비를 해왔다. 국내와 해외를 2년간 한달살기하며 나를 더 알고, 앞으로의 나를 찾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계획대로였다면 대망의 갭이어 시작은 2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이 원대한 계획에 대해 지인을 만날 때마다 떠들어댔다. 친구들로부터 아쉬움과 부러움 받을 만큼 받았고, 선택받은 몇몇 사람에겐 이미 여행지로의 초대장까지 남발 해 둔 상황이다.     

 

 가장 어려울 거라 예상했던 부모님 설득이라는 난관을 무사히 뚫고, 남편은 11월 말로 일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보다 앞선 9월 말, 집을 부동산에 전세로 내놓았다. 통상 2 달이면 계약이 될 거라 생각했고, 부동산 사장님도 가능을 장담하셨다. 됐다. 모든 게 순조롭다(순조로운 줄 알았다). 


 머릿속 스케줄 상 지금은 짐정리와 짐 싸기를 할 때이다. 버릴 것, 나눌 것, 중고 거래할 것으로 나누고, 열심히 짐을 빼고 있을 시간이다. 가벼우며 가성비 좋은 여행 배낭을 검색하고, 28L 트렁크가 필요할지 24 L면 충분할지 가방 쇼핑을 하러 다닐 때이다. 


 현실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인생은 쉬울 텐데, 모두가 인생이 어렵다고 하는 것 보면 계획과 실현의 상관관계는 썩 높지 않은가 보다. 10월이 되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의 위기 속 부동산 시장은 얼어붙었다. 9월 마지막 주, 부동산에 내놓자마자 그 주에만 3명이 집을 보러 왔던데 반해, 10월은 한 달 내내 단 1명이 보고 갔고 11월 초 현재 2주째 아무 연락이 없다. 9월엔 집 보러 오면 그런가 보다 했으나, 10월엔 귀한 손님이 오듯 나와 남편은 긴장했다. 11월에 오시는 분이 있으면 우리 두 사람 양말발로 뛰어나갈 기세다. 휘유, 이럴 줄이야     

 몇 년에 걸쳐 나름 철두철미하게 세웠던 계획이 담긴 엑셀과 한글파일을 한 달째 열어보지 않고 있다. 원래 계획은 이러했다. 살고 있는 집을 전세로 주고, 전세 보증금으로 투자를 하며 2년간 국내와 해외를 천천히 여행할 생각이었다. 여행 첫 해의 예산은 모아두었으니 2년 간의 투자 수익금으로 1년 치 여행비용만 만들면 되므로 해볼 만했다. 소위 배당 귀족주들을 조합하여 십수 번 시뮬레이션을 돌려 '배당금으로 여행하기', 채권/주식/예적금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안전하게 벌고 재미나게 여행하기' 등 몇 가지 시나리오의 엑셀파일을 만들었다. 10여 개의 부부여행 유튜브와 블로그를 뒤져서 물가가 저렴하며 안전하고 날씨도 좋은 나라들을 모아 한글파일에 정리해 두었다. 장단점 분석과 예산, 주의 사항, 꼭 방문할 곳을 빼곡하게 정리했다. 파일이 늘어나면 날수록 마음이 든든해졌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11월 중 뜻하지 않게 지출해야 할 일이 터졌다. 모아둔 1년간 여행비에 대출까지 받아야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다. 앞서 말했듯 남편이 11월 말로 퇴사를 하니, 우리 집엔 12월부터 현금이 없다. 0도 아니고 (-)인 상황이 된다. 잠이 안 온다. 에휴~


 인간이 계획을 짤 때 신은 박장대소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또 신을 웃겼다. MBTI검사에서 J(계회적)로 나오는 나 때문에 신은 참 여러 번 웃으셨겠다. “주님, 이 재미있는 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자금 및 여행계획이 원활하게 풀려 두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년 어떤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저 그 모든 것이 신의 뜻이었으리라, 그게 내게 주신 가장 좋은 것일 거라 믿는다. 

 제대를 앞둔 병사의 심정으로 11월 퇴사를 기다리고 있는 남편에게 우리가 올 겨울 엄동설한에 등과 배가 따뜻하기 위해 좀 더 일하라는 비보를 알리러 가련다. 물론 심심한 위로의 말은 잊지 않을 것이다. 

I am 쏘리~  

매거진의 이전글 다 좋은데, 무슨 돈으로 2년간 여행을 간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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