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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04. 2024

40대 파이어족 부부 제주에서의 일상

백수부부 어떻게 여행하나 들여다보기


 긴 여행의 첫 목적지는 제주도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약 4시간 소요) 제주에 도착했다. 메밀국수 한 그릇으로 울렁이는 속을 누르고, 다시 1시간을 달려 제주의 남쪽 서귀포에 도착했다.      


 여행 첫 주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몸과 마음 달래기’ 시간으로 정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시댁에서 며칠 머물렀는데, 큰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잘 다투지 않던 부부가 5차 대전, 6차 대전을 이어가다 둘 다 마음이 지쳤고, 나는 도착과 동시에 토사광란을 일으켜 서귀포의료원 응급실을 다녀오기도 했다. 몇 년 간 준비하고 꿈꿔온 시간인데, 시작이 참으로 요란스럽다. 여행이고 나발이고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과 ‘다행이다, 여기가 제주라서’라는 두 개의 마음이 공존했다.


 몸이 차츰 회복하며 동네 바닷가 산책을 시작했다. 2월의 제주는 어디를 가든 조용해서 힐링 장소로 최고였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코코아 한 잔을 마시고 있으면 ‘행복’이라는 감정이 간지럽게 올라왔다. 일부러 “행복해~” 소리를 입 밖으로 내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며 마음의 회복을 도모했다.

 

우리 부부 여행 콘셉트는 쉬엄쉬엄이다. 하루에 몇 개씩 일정을 소화하는 관광객이 아니라 현지에 스며들어 살아가는 여행자로 살고자 한다. SNS 추천 맛집보다 우연히 알게 된 현지식당을 선호하고, 유명 관광지 도장 찍기보다 동네 산책에 더 시간을 들이고 있다.     

 그런 내 스타일을 아는 친구들은 궁금한가 보다. “거기서 뭐 하며 지내?” 가끔 질문을 받는다.

 

 40대 백수 부부의 심심한 듯 재미있고, 하는 것 없어 보이나 나름 바쁜 일상을 공유한다.      


- 눈이 떠질 때 일어난다. 먼바다를 보며 스트레칭하고 따뜻한 물 한 컵을 마신다.      


- 오전 9시, 한국 주식 개장과 동시에 업무가 시작된다. 이 시간이 가까워지면 남편과 나는 “출근합시다.” 서로를 독려하며 폰으로 업무를 한다. 간밤의 미국 시장 특이 사항을 살피고, 환율을 확인하고 외화 RP를 매수할지 매도할지 결정한다. 공모주 상장 일정을 업데이트하고 필요시 주식 매수/매도 거래를 하기도 한다.   

   

- 1시간 이내로 업무를 마치고 서로에게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인사를 한다. 일을 빨리 마친 사람이 준비해 준 음식으로 아침 식사를 간단하게 한다.      


- 월수금 10시 반, 나는 시에서 운영하는 체육관에서 요가를 하고 남편은 인근 월드컵 경기장 트랙을 뛰면서 운동을 한다. 운동을 마친 후 씻고 점심을 먹는다. 점심 한 끼는 주로 외식인데, 메뉴 및 식당은 남편이 진지하게 고민하여 엄선한다.

     

- 오후 시간은 자유시간이다. 날씨가 좋을 때는 근처 자연을 즐기러 떠날 때도 있지만, 보통은 인근 바닷가 한쪽에 ‘우리 자리(첫번째 사진 참고)’라 명명한 곳에 정차하고 음악을 듣거나 글을 쓴다. 낮잠을 자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며 각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 늦은 오후, 마트에 들러 장을 봐와 저녁 준비를 한다. 저녁 식사 준비는 주로 내가 맡는다. 식사 후 드라마나 예능 프로를 시청하다 밤 10시경 야후 파이낸스로 미국 경제뉴스를 검색한다. 10시 반, 미국 주식 개장을 앞두고, “출근합시다.” 외치며 두 번째 출근을 한다. 이번에도 업무는 대개 1시간 정도로 마치나 일이 많을 때는 야근(?)을 하기도 한다.     


 하는 것 없어 보이나 나름 계획적으로 살고 있는 파이어족 부부의 여행 일상이다. 결혼 13년 만에 남편과는 부부, 친구, 짝꿍, 아빠와 딸 외 하나의 관계가 더 생겼다. ‘투자파트너’. 서로에게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동업자로서 관계를 이어나가길 바란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남편은 이 시간을 통해 스스로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했다. 남편의 바람이 내게 이루어지나 보다. 여행 한 달 만에 내가 행복을 느끼는 것들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안정적인 관계, 여유로운 마음, 아름다운 음악, 입에 맞는 음식 그리고 적정 거리를 둔 자연. 하나라도 틀어지면 괴롭지만,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면 소소할지라도 행복하다.


남편이 “오후에 뭐 할래?” 물을 때 “바닷가, 우리 자리” 대답을 자주 한 이유는 내가 행복을 느끼는 요소들을 다 함께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살게 될 곳에서도 저마다의 ‘우리 자리’를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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