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Would you please 나가줄래?

by 윤슬

인생에서 큰일을 당하며 깨달은 사실이 또 하나 있다.

평소에도 '저 사람 별로다.' 싶은 인간은 내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완전 shit으로 판명 날 확률이 높다.



복직 후, 마음은 앞서 나가는데 몸은 생각보다 더디게 회복했다. 마음이 몸을 끌고 다니느라 고생했지만, 팀장님과 동료 직원들의 배려로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니 한계가 명확히 보였다. 체력적 뒷받침이 없는 자에게 미래를 보장해 주는 직장은 없고, 나라는 사람은 대충 현실과 타협하고 비비고 눌러앉아 안 들리는 척, 안 보이는 척할 위인이 못 된다는 사실이었다.

아래는 복직 2년 즈음 블로그에 썼던 글이다.


2019.7.20


어린 시절,

유치원생 동생이 초등학생 언니들 노는데 끼고자 하면

착한 언니들은 동생에게 "깍두기"라는

이름을 붙여 놀이에 끼워주곤 했다


건강문제로 직장에서 단축근무로

하루에 5시간만 일하고 있다.

이렇게나마 회사를 다닐 수 있는 게

감사함 충만한 일이지만


기분이 참 애매해질 때가 있다.

1명이 아닌 0.5명으로 취급될 때

근무시간으로 보았을 때

틀린 말 아닌 거 나도 아는데


기분이 참 깍두기스러워지곤 한다


복직 2년이 지나 인사이동이 있었고, 예전부터 별로라 생각했던 선배가 나의 직속 상사가 되었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말을 걸었다.


“김 차장, 김 차장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어요. 김 차장 생각나 샀으니 다음에 줄게요”

무슨 책일까 궁금했으나 그러려니 하고 잊었다.

당시 나의 근무지에서 매우 머리 아픈 일이 터졌다. 우리 회사와는 전혀 상관없는 외부 사건과 어이없게 엮여버려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화가 난 민원전화가 빗발치고, 기자들의 문의가 끊이지 않던 날이었다. 이유도 없이 전화로 쌍욕을 먹고, 반박 기사 쓰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상사가 내 옆자리로 쓱 다가왔다.


바바리코트 안주머니에서 회사 대봉투에 넣은 책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꼭 읽어보세요.”

아~지난번 말씀하셨던 책이구나. 그런데 뭘 이렇게 조심스럽게 주시나.

"넵, 감사합니다."

계속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날리며 업무를 수습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초과 근무를 하고 녹초가 되어 퇴근한 후, 책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봉투를 열었다. 두꺼운 책의 앞부분 몇 페이지를 읽다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책에는 나처럼 병을 얻어, 혹은 사고로,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사유로 어쩔 수 없이 직장을 그만두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결론은 직장 그만두고 다들 성공한 내용이기는 했지만, 당시엔 결론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대체 그가 이 책을 내게만 준 이유가 뭘까?

이런 비상 시기에, 그렇게 비밀스럽게.


매우 그다웠다. 잘 다려진 양복과 머리카락 한 올도 내려오지 않게 빗어 넘긴 앞머리, 향수를 회사 책상에 올려두고 수시로 뿌리는 신사. 그러나 그는 일보다는 회사의 혜택을 놓치지 않고 챙기는 데에 급급했고, 업무로 습득한 지식들을 엮어 본인과 아내 이름을 박아 공저로 책을 냈으며, 개인사와 회사일이 겹쳤을 땐 개인 일을 앞세우는 사람이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딱 그답게 은근히 사직을 권고하는 것으로 짐작되었다.


“Would you please 나가줄래?”

나직이 말하는 그의 번쩍거리는 이마와 기름 냄새가 날 것 같은 올백 머리가 떠올라 속이 울렁거렸다.


그 후 그를 마주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해 견딜 수가 없었다. “말 알아들었으면 썩 꺼지지 않고, 왜 아직 있는 거야?” 차가운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한 달쯤 지나니 내게 물어보기도 했다. 책은 읽었느냐고,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읽는 중이라고 얼버무렸다.


전 직장은, 사규를 어겼거나 심히 사회적, 도덕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사람을 쉽게 자르지 못하는 공기업이었다. 단지 내가 그의 눈에 들지 않았고, 하필 내가 관할하는 근무지에서 일이 터졌고, 그 일에 본인이 미련하게 말려들어 피곤하게 된 이유로, 그 탓을 모두 내게 돌리며 "도움 안 되는 것 같으니라고. 썩, 꺼져!"를 책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그렇게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다. 깍두기로 함께 하는 것 스스로에게도, 남에게도 미안해서 적절한 시기가 되면 내 입으로 말하고 내 발로 퇴사하려 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퇴사 권고를 받으니 슬프고 창피하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몸의 불편함은 혼자 다스리며 참을 만했지만 마음의 불편함은 버티질 못하겠어서 결국 사표를 냈다.


몸이 아파도 참고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이었고, 잡고 있던 끈마저 놓치게 만든 것 역시 사람이었다.


암 환자의 복직 생활은 그렇게 3년을 넘기며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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