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 학교에선 2주에 한 번씩 동아리 활동 시간이 있었다. 학기 초 가입할 동아리를 정했고 그때 난 수어 동아리에 들어갔었다. 딱히 이유나 동기는 없었다.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는 인기가 너무 많았고 가도 어울리지 못할 거 같아 지레 포기했다. 인기 없는 동아리 중 그나마 뭘 배울 수 있는 곳을 선택했다. 수어 동아리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같은 꿈과 사랑이 가득한 노래로 수어를 배우는 곳이었다. 학교 별관 작은 실험실 같은 곳에서 몇 없는 선배들과 인사를 나눴다. 다 모여도 10명이 안 되는 작은 동아리. 왜 수어를 배우려고 하는지, 왜 이 동아리를 선택했는지는 나누지 않았던 거 같다. 선배들은 다가오는 학교 축제에 동아리마다 무대를 해야 한다고 했고 그들의 추천으로 그나마 쉬운 곡을 선택해 수어를 배웠다. 구전동화처럼 앞선 선배에게 배웠던 이들이 새로 들어온 신입인 우리에게 수어를 알려줬다. 모임 회차가 거듭할수록 선배들은 보이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우리들끼리 같은 곡을 반복하며 연습했다.
그렇게 2개월 후 학교 축제가 열렸다. 과학 동아리 친구들은 옷을 차려입고 세련되고 멋진 팝송에 맞춰 춤을 췄다. 번쩍이는 조명을 받아 그들은 아이돌처럼 반짝반짝 빛이 나보였다. 어떤 한 친구는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떨지도 않고 감탄스러운 음색을 뽐냈다. 그 자리에서 우리도 무대를 했다. 노래에 맞춰 손으로 열심히 말을 그려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수어를 왜 하고 있는 거지’, ‘이 말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여기 있을까?’, ‘괜히 착한 사람인 척 가식을 떠는 거 같다’라는 두서없는 생각으로 무대하는 동안 온몸이 간지러웠다. 때문에 중학교 시절의 수어 공연은 창피해서 기억하기도 싫은 추억이었다. 서랍 깊숙이 꼭꼭 숨겨두고는 나도 모른다고 시치미 떼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때 기억이 생각난 건 얼마 전, 합정과 망원 사이 한 2층 카페에서 창밖을 내려다봤을 때였다. 각자 자전거를 세워두고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거 같은 두 사람. 적당한 간격을 두고 그 둘은 공기 속에서 자유롭게 훨훨 손을 움직였다. 자신을 수어로 전하고 있었다. 살아있는 수어였다.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있고 그 메시지를 받고 반응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대화가 끝날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어를 사용하는 농인은 언제나 내 주변에 있었을 텐데. 그들의 모습이 이제서야 또렷이 보였다. 내 주변에는 수어를 쓰는 사람이 없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수어를 배우는 시간도, 수어 공연도 가식적으로 느꼈던 한 시절의 내가 지나가고 있음을 느꼈다. 어째서였을까 생각해보면 강렬한 기억은 없다. 다만 살면서 작은 돌멩이들이 내게 날아왔고 그걸 하나둘 맞고 나니 조금씩 깨진 부분이 생겼다. 그 돌멩이 중 몇 개를 떠올려보자면 이런 것들이었다.
대학 시절 좋아하던 드라마에서 수어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커피숍에 있던 주인공이 갑자기 카페로 들어오는 한 인물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말소리를 줄이고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전전긍긍하자 커피숍 직원이 수어로 말을 건넨다. ‘도움이 필요하냐’는 그 말이 TV에서 본 첫 수어였다. 음성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시각언어를 고려해봐야 한다는 걸 그 장면을 통해 익혔다.
시간이 지나 사회생활을 하면서 1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출퇴근 시간을 버티기 위해 팟캐스트를 즐겨 들었는데, 애정하는 한 팟캐스트 채널에 이길보라 감독이 나왔었다. 그는 농인 부모의 자녀인 코다(CODA)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이었고 작가였다. 팟캐스트에서 그는 코다로 살아온 경험을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로 전해주었다. 그 덕분에 농인이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걸 배웠고 음성언어와 시각언어를 넘나들며 세상을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는 ‘코다’라는 존재도 알게 되었다. 이길보라 감독은 한 칼럼에서 시골 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에 자신의 부모님은 장애인이 아니고 보라네 부모님이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맥락에서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쌓은 이길보라 감독은 내 주변 수어를 쓰는 첫 번째 사람이 되었고 그로 인해 ‘주변에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는 왜곡된 생각이 사라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유튜브로 실시간 행사를 시청하던 중 댓글창에서 문자통역이 가능하신 분이 있냐고 물어본 사람이 있었다. 그 말에 다시 영상을 살펴보니 수어통역도 문자통역도 없는 걸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함께 시청하는 분들과 십시일반으로 들리는 이야기를 문자로 타이핑해 채팅창에 올렸다. 덕분에 말소리를 실시간으로 문자로 전달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과 빠르고 정확한 타이핑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절실하게 느꼈다. 참여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두 느끼는 듯했고 누군가가 주도로 문자통역을 하다 늦어지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하고 똑같은 내용이 중복해서 올라오기도 했다. 뒤늦게 이 상황을 발견한 행사 운영자는 급히 진행되어 문자통역 혹은 수어통역이 준비되지 못한 점을 사과하며 운영자 계정으로 타이핑을 이어갔다. 이 일로 이제는 수어나 문자와 같은 시각언어가 함께 제공되지 않는 온라인 행사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가 했던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장애를 문제로 보는 사회가 문제라는 말’에 달의 반대편을 본 거 같은 놀라움과 그동안 편한대로 사회를 바라봤다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
이 경험들이 돌멩이처럼 날아와 허술한 논리로 버티고 있던 편견을 조금씩 부쉈다. 그리하여 이제서야 일상에서 수어를 알아볼 수 있었고 중학생 시절 수어를 배웠던 내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또래 친구들과 작은 연습실에 옹기종기 모여 새로운 수어를 배우고, 틀린 부분을 반복해서 연습하던 그때가 그립다. 그리고 학교 축제에 올라선 무대가 보인다. 그곳에도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관객으로 바로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의 가족, 친척 혹은 그의 친구, 친구의 친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이제야 보인다. 언어를 배우는 것이 그 언어를 쓰는 세계의 역사와 문화를 익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젠 새해마다 다짐하던 영어공부를 내려놓고 몰랐던 세계를 알게하는 수어를 다시 배워보고 싶다. 이번엔 정말 진지한 태도로 재밌게 할 수 있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