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육식의 종말
'살충제 달걀'로 유럽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들썩이는 요즘이다. 달걀은 그 자체만으로도 음식이 되고 식재료로도 사용되는 만큼 그 위험성이 내 생활을 위협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과연 '살충제 달걀'만 위험한 것일까? 우리 주위엔 나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요즘 나에게 '살충제 달걀'만큼 공포감을 주는 '쇠고기'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먹기에 위험한 쇠고기
많은 가축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길러지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책 '육식의 종말'을 읽기 전에는 그렇게 와 닿지 않았고 실상을 정확히 몰랐다. 단순히 가축이 살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구나, 사료에 뭘 조금 섞기는 하겠지 이 정도였다. 책 속의 실상은 그보다 더욱 심각했다. 해당 책은 2002년에 출간된 책임을 참고하며 읽어보자.
최단 시간에 최적의 무게를 얻기 위해 비육장 관리자들은 성장 촉진 호르몬과 사료 첨가제 같은 약제들을 소들에게 투약한다. 작은 정체 형태의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는 귀에 투약되는데, 이 호르몬은 서서히 혈액 속세 스며들어 호르몬 수치를 2~5배까지 끌어올린다. 에스트라디올(발정 호르몬의 일종),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 프로게스테론(황체 호르몬)도 투약된다. 이 호르몬들은 세포를 자극하여 추가 단백질을 합성시키고 근육과 지방 조직을 좀 더 빠르게 성장시킨다. 현재 미국의 모든 비육장에서는 95% 이상의 소들에게 성장 촉진 호르몬을 투약하고 있다.
거세되고 약품이 투약되고 유순해진 육우들은 옥수수와 수수를 비롯한 여타 곡물들과 신종 사료들을 먹어치우며 여물통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사료에는 제초제가 포함되어 있다. 가축들이 섭취한 제초제는 그들의 신체에 서서히 쌓여가며, 살충제 또한 쇠고기 덩어리와 함께 소비자인 인간에게 전달된다. 전미 과학아카데미 연구회(NRC)에 따르면 시장에 나오는 온갖 식품들 중에서 쇠고기 살균제 오염 정도가 소비자들의 암을 유발하는 전체 원인의 11%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책] 육식의 종말
단순히 환경이 비좁고 오염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빨리 돈을 벌기 위해서 저렇게 많은 약품들이 투여되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곡물에 수많은 제초제까지.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살아있는 생명체에 행해지는지 충격적이다.
한 공장에서 해체 공정을 가동하는 압력은 너무나 엄청난 수준이기 때문에 경영진은 제품에 윤활유를 뿌리는 지경에 이를지라도 절대로 생산라인을 멈추려 하지 않으며, 손상된 쇠고기에 경고 표를 붙이려 하지도 않는다. 가공실의 벽은 온통 더러운 찌꺼기들과 곰팡이들로 가득하고, 작업장에서는 작업자들의 머리 위로 기름이 뚝뚝 떨어진다.
[책] 육식의 종말
이미 황폐해진 소에게 인간은 도축이라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먹으려면 죽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찾을수록 축산단지들이 생겨난다. 가축을 사람들이 먹기 쉬운 형태로 만드는 공장은 이기적인 자본주의로 넘쳐났다. 정말 건강한 소가 와도 저런 환경에서는 부패하고 오염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생각해보면 수많은 식품을 다 검사하고 제대로 표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 우리 먹었던 수많은 쇠고기들 중 오염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좋게 우리는 아직은 건강하게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위 글귀를 읽는데 영화'옥자'가 떠올랐다. 사실 '육식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은 것도 영화'옥자'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람과 함께 뛰놀면 성장했던 옥자 역시 저런 공장에 끌려갔다. 그곳에 수많은 옥자들이 울부짖으면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소들이 도축되고 있겠지?
지방이 많은 쇠고기와 전 세계 기아문제
우리가 이전부터 소를 먹어왔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소를 가족처럼 아끼면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로 생각했고, 소를 매우 신성시 여겼다. 하지만 현재 인도 등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소를 신성시 여기는 곳은 없다. 어떻게 우리가 소를 사육하고 먹게 되었을까?
영국인들은 유럽에서 가장 쇠고기를 탐하는 민족이었다. 그들의 켈트족 선조들은 기원전부터 영국 섬들에 소 사육 문화를 구축했으며, 로마인들도 43년에 영국을 침략하면서 소 떼를 이끌고 왔다. 결국 로마의 농업은 스코틀랜드 남부 및 동부의 저지대에 자리 잡았고, 켈트족의 소 사육 문화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북부 및 서부에까지 뿌리를 내렸다.
지방 많은 쇠소기를 원하는 영국인들, 평원의 황소를 구입할 돈줄이 필요한 서부 목축업자들, 잉여 옥수수를 먹어 칠 울 비육우를 원하는 중서부 옥수수 재배 농부들, 새로운 식민지의 투기적 사업을 이용하려는 영국 재정가들의 관심사가 서로 한 덩어리가 되어 신흥 유럽-미국 축산 단지 창출되었다. 미국인들의 입맛도 지방이 많은 쇠고기를 선호하는 영국의 취향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책] 육식의 종말
책에서는 그 시초를 영국에서 찾고 있다. 영국인들은 선조 때부터 쇠고기를 탐해왔다고 한다. 그런 문화와 습성이 유럽 전역으로 퍼지게 되었고,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 침략 등으로 미국, 일본 등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역사적인 흐름과 소의 사육, 육식문화가 너무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육식을 '단순히 내 몸에 좋지 않아!'라는 관점을 벗어나 새롭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1900년 이후로는 점점 더 많은 소가 옥수수에 의존하게 되면서 곡물 가격의 변동이 쇠고기 가격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으며, 거꾸로 연간 소 생산과 쇠고기 수요의 변화도 곡물 가격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공조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6억 톤의 곡식이 가축들, 그 대부분은 소의 먹이로 사용되고 있다. 만약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가축 사료가 아닌 인간이 직접 소비한다면 지구 상의 10억의 사람들이 곡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육식의 종말
그렇게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은 소를 사육하고 소고기를 소비했다. 이로 인해 소를 사육하는데 곡물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이고 엄청난 양의 곡식들이 인간이 아닌 소에게 제공된다. 소가 먹는 그 곡물을 지구 상의 넘쳐나는 기아들에게 전달된다면 사람이 굶어 죽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쇠고기 1인분이 나의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곡물 가격을 상승시키게 하고 어떤 사람을 굶어 죽겠다고 하는 것이다. 쇠고기를 먹는 것에 의미가 정말 엄청나게 다가온다. 하지만, 이러한 연결고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소의 사육이 사막화, 열대우림 파괴, 지구 온난화를 일으킨다
우리들 모두는 전 세계 열대우림의 손실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예를 들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사육된 육우의 쇠고기로 만든 1/4파운드짜리 햄버거 한 개에는 대략 75킬로그램에 이르는 생명체의 파괴가 뒤따른다. 여기에는 20~30종의 식물, 100여 종의 곤충, 수십 종의 조류, 포유류, 양서류가 포함된다.
[책] 육식의 종말
소의 사육을 위해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는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그 속에 수많은 식물, 곤충, 조류, 포유류, 양서류들이 사라진다.
공유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소 한 마리는 매달 900파운드의 식물을 먹어치운다. 그들은 목초지의 풀을 모조리 뜯어먹고 관목과 나무의 싹도 훑어먹는다. 그들의 강력한 발굽은 토착식물들을 짓밟고 1평방 인치당 24파운드의 압력으로 토양을 단단히 다진다. 토양이 다져지면 흙 알갱이 사이의 공간이 좁아지는데, 이는 결국 흡수되는 수분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토양은 많은 수분을 저장할 수 없으면, 지표면을 흐르는 급류에 의해 손쉽게 침식된다. 또한 방목지의 미생물 세계에 미치는 충격도 이에 못지않다. 박테리아, 원생동물, 균류, 선충, 곤충, 지렁이, 진드기들은 5센티미터 깊이의 표토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토양을 기름지게 하고 새로운 토양을 숨 쉬게 하는데 긴요한 역할을 한다. 소 떼가 토양을 짓밟으면 이런 자그마한 미생물들의 서식지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해지며, 이미 위태로운 목초지의 토양은 한층 더 약화된다.
[책] 육식의 종말
소들은 공유지에 나무의 싹까지 모조리 뜯어먹으며, 그들의 압력으로 다져진 토양에는 미생물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다. 이는 공유지를 사막화시키는 것이다.
육식문화가 만든 차별
근대에는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지만, 육식 문화를 둘러싼 과거의 선입견과 관행은 줄곧 음식과 성별의 구분을 강화시켰다. 프랑스 인류학자 부르디외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육류와 성별에 대한 근거 없는 통념이 여전히 만연해 있다고 말한다.
"모름지기 사내라면 강한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이 어울린다. 남성들은 맛있는 음식 한 조각을 아이들과 여자들에게 남긴다. 육류는 남성들에게 적당한 반면, 샐러드 같은 채소는 여성들에게 더 적당하다."
[책] 육식의 종말
육식문화는 성을 구분 짓게 하고 성에 따른 차별적인 대우를 만들어냈다. 쉽게 말해 육식은 성차별을 만들어냈다.
비어드는 당대의 각광받던 생물학적, 사회적 개념을 고기를 먹는 민족이 더 우수하다는 오랜 유럽의 선입견과 결합시킴으로써 정교한 인종 이론을 만들어냈다. 즉 성과 계급 차별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육류와 우월성, 식물과 열등성을 결합시켜 또 다른 경계선을 만들어내는 데 이용했던 것이다. 백인 식민 세력과 다른 유색 원주민들과의 차별을 공고히 했던 것이다.
쌀 주식의 인도인과 중국인들, 그리고 감자 주식의 아일랜드 농부들은 기름지게 먹는 영국인들에게 줄곧 복종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참패한 주된 요인들 중 하나가 죽는 순간까지 절대 물러서지 않는, 쇠고기를 주식으로 하는 민족과 그가 처음으로 마주쳤다는 것이다.
[책] 육식의 종말
육식문화는 성차별, 계급 차별뿐 아니라 인종 차별까지 발생시켰다.
책에 내용을 일부만 정리하고 나열했는데도 소의 사육, 쇠고기 소비 때문에 발생된 문제들이 끝이 없다. 쇠고기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기아 문제도 발생시키며 우리의 지구를 해친다. 또한 육식문화는 성차별, 계급 차별, 인종차별 등을 생겨나게 했다. 이렇게 보니 지구 상에서 쇠고기와 관련 없는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쇠고기를 먹는걸까?
우리가 동물을 사랑하지 않기에 고기를 먹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려동물을 가족처럼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 이 때문에 '개고기'를 극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 논리는 어떻게 가족 같은 개를 먹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는? 돼지는? 닭은? 가족이 아니라 가축이기에 먹을 수 있는 것일까?
오늘날 소와 다른 가축들은 일반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멀찍이 떨어져 있다. 사람들은 지역 슈퍼마켓에서 미리 포장된 형태의 쇠고기 부위를 구입한다. 목축업자들은 전국의 고기 생산용 소들을 많은 공업 단지들처럼 사람들의 시야에서 차단된 고립된 장소에 격리시켰다. 현재 비육장은 고도로 자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관리인'과 짐승들 간에 직접적인 접촉은 아주 뜸한 편이다. 심지어 일상적인 사료 공급도 컴퓨터로 관리되곤 한다. 제임스 서펠은 "이 정도의 거리감에서 동물들은 단순히 더 많은 생산량을 위해 추상화된 존재인 생산의 숫자나 단위가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책] 육식의 종말
핵심은 이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쇠고기를 먹지만, 소를 직접 도축하지 않는다. 또한 도축하는 상황을 보지도 못한다. 우리 생활환경 속에서 소는 뿐더러 도축 공장조차 볼 수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비닐팩으로 포장된 조각난 쇠고기뿐이다. 이 때문에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동물을 죽인다는 죄책감과 불편함이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쇠고기를 사는 것은 마트에서 과자나 휴지를 사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책 '육식의 종말'을 읽으며 육식을 자제하는 것은 지구를 위해서도 해야 하지만, 내가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서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나 역시도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되기란 힘든 것을 안다. 영화 '옥자'와 책 '육식의 종말'을 본 이후에는 빨간 생고기를 구워 먹은 적은 없다. 그러나 집안 곳곳에 있는 햄과 같은 가공식품과 치즈나 달걀과 같은 동물성 식품을 아예 끊기란 어려웠다. 그리고 밖에서 만두를 사 먹으면서 "돼지고기를 빼주세요."라고 요구하기는 무리가 있고 주위에 비 육식 혹은 채식주의자를 위한 음식을 제공하는 곳도 찾기 힘들다. 만약 빠질 수 없는 회식 때 삼겹살이라도 먹으면 나는 그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을 거 같다.
그래서 일단 내가 조절할 수 있는 환경과 상황에서 최대한 노력해보는 방향으로 하고 있다. 집에서 밥을 먹을 때만큼은 육류를 먹지 않고 있다. 그래서 먹게 된 것이 '버섯'이다. 버섯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우연히 간을 해서 버섯을 구워 먹으니 감칠맛도 있고 쫀듯쫀듯한 식감에 포만감도 주었다. 그 후로 자주 버섯을 구워 먹고 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왜 고기 대신 버섯을 먹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훗날 내 앞에 어떤 음식이 놓여있을지 궁금하다.
내가 그 음식들을 먹으며 또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