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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저 May 08. 2023

곡선의 산

초보운동러 산을 좋아하다


코끝에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과 따스한 햇볕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꽃잎이 바람에 흐트러져 쏟아진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지만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멋지게 번지점프를 한다거나, 급작스러운 발표 요청에 유창한 능변으로 모두를 감동하게 하는 것처럼 보통의 나와는 달리 또 다른 내가 '감쪽같이' 멋지게 무언갈 해내는 상상을 말이다. 오랜만에 치악산 산행을 했다. 원주에 터를 잡고 생활하는 6년 동안 치악산 비로봉은 총 세 번을 갔었다. 황골탐방지원센터에서 비로봉 정상까지 5.8km 구간 중 치악산 입석사에서 황골 삼거리까지 1.2km는 숨이 헐떡거리는 깔딱 고개 구간이다. 전에 왔을 땐 무거운 다리를 등산 스틱에 의지한 채 수시로 쉬어가던 구간이었는데, 오늘은 참 이상했다. 전혀 힘들지 않았다. 가파르게 놓인 바위를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워서 누군가의 몸을 내가 잠깐 빌리고 있는 것은 아니겠느냐는 착각마저 들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해서 그런 걸까 청아하게 맑은 하늘을 보니 기분이 설레어서 그런 걸까. 이유야 무엇이든 오늘의 또 다른 내가 ‘감쪽같이’ 무언갈 해냈다는 사실이 꽤 만족스러웠다.


“니 고등학교 2학년 때 체육 전교 꼴찌 했던 거 기억 안 나나.” 프로 운동러가 된 지금은 상상하지도 못하는 우리 집 금기어, ‘체육 전교 꼴찌’는 내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 걱정스러운 마음에 아버지가 운동해야 한다며 억지로 태권도 학원을 보냈을 땐 울면서 뛰쳐나올 정도였다. 부산 북구 백양산 자락에 자리한 초등학교에 다니며 6년 내내 뒷산으로 소풍 하였다. 산을 깎아 동네를 만든 터에 출발점부터 치고 올라가는 코스가 대부분이었다. 단체로 우르르 일렬로 올라가는 모습은 앞사람 꽁무니만 따라 힘겹게 올라가는 개미 떼 같았다. 자연을 만끽하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은 사치였다. 시작부터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줄기를 거칠게 훔쳤다. 올라가는 거리만큼 다시 내려와야 할 등산을 왜 하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은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시구절일 뿐, 내려가는 길에 보았던 유일한 것은 빠른 속도로 흙길을 내딛는 내 운동화였다. 똑같이 보이는 감흥 없는 초록색 풍경은 지루했으며, 기억조차 희미한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소풍 땐 비가 와서 틈이 생긴 바위를 잘못 디뎌 넘어지기도 했다. 화가 났다. 그때부터였다. ‘내 의지로 산을 갈 일은 영영 없을 거야.’라고 다짐한 것이. 취업은 힘들었고 영영 갈 일 없으리라 생각했던,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직장을 잡았다. 회색빛 빌딩이 가득한 도시와 달리 고개를 들어 까만 밤에 쏟아지는 별을 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상이었다.


산을 좋아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언제부턴가 산을 좋아하게 되었다. 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곡선을 따라 이어지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느림보다는 빠름을 삶의 가치로 설정해 놓고 겉으로 보이는 결과만을 위해 무섭게 달려가고 있다. 소중한 일보다 중요한 일을 먼저 하면서 소중한 인간관계도 점차 ‘중요한’ 일에 눌려 무관심해진다. 산을 보면서 목표를 바라보되 완만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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