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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서 일을 조금 하고 있을 때였으니까 아마 서너 시쯤 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전화해서 밥 잘 챙겨 먹어라 운동해라 몸 아프면 미련 떨지 말고 병원 가라 하면서 친정 언니 같은 잔소리를 해주시는 지인께서 전화를 주셨다. 대뜸 와서 김치 좀 가져가라, 고 하셨다.
그도 나도 소위 '김치 없으면 밥 못 먹는' 골수 한국사람까지는 아니어서, 김치란 뭐 꼭 쓸 일이 있을 때나 마트에서 조금씩 사다 놓고 먹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보다도 내가 좀 더 심했다. 그는 동치미나 나박김치 종류의 국물김치는 매우 좋아했고 가끔은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정작 먹으러 간 메뉴보다도 그 식당의 동치미 맛(오래되고 유명한 식당일수록 동치미가 맛있는 경우가 많긴 하다)에 감동을 받고 나오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있긴 했지만 나는 뭐 그런 편도 아니었다. 아무튼 또 주시는 거라면 사양 않고 덥석 받는다는 나름의 신조에 따라 긴히 버스씩이나 타고 지인 분의 댁에 김치를 가지러 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기껏 1 킬로그램 짜리 마트 김치 포장 정도를 생각하고 갔었다. 그거 뭐, 받아 오면 김치볶음밥도 해 먹고 부대찌개도 한 번 끓여 먹고 김치전도 해 먹고 하다 보면 금방 다 먹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이었다. 물론 이것은 내가 본인이 직접 살림을 하시는 분의 규모를 대단히 과소평가한 것이어서, 나는 이거 과연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갈 자리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밀폐용기 두 개에 하나는 나박김치 하나는 열무김치를 얻어들고 집을 나왔다. 이미 몇 번이나 말한 바 나는 차가 없고, 그래서 체감상으로는 쌀 한 섬 무게 정도로 느껴지는 이 김치통 두 개를 버스까지 타고 집까지 가져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집에 와서 무게를 달아보니 정확히 8킬로그램이긴 했다)
나는 원래도 김치를 썩 좋아하진 않고 그나마 국물김치 종류는 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태산 같은 국물김치를 도대체 어떻게 다 먹어 없앨까 하는 걱정을 오후 내내 했다. 그러나 뭐, 어차피 다 같은 김치가 아닌가. 당장 인터넷을 찾아보니 나박김치로 볶은 김치볶음밥은 아삭아삭한 데다 국물을 조금 넣어 간을 잡아주면 일반적인 김치볶음밥과는 다른 풍미가 있다는 글이 있었다. 출출한 오후에 소면이나 대충 삶아서 그대로 말아먹어도 나쁘지 않고, 건더기만 건져 잘게 자른 뒤 참기름 한 바퀴 들러서 비벼 먹어도 맛있을 터이다. 열무김치야 뭐, 당장 새 밥을 할 일이 생기면 냅다 건더기 건져다가 밥에 얹고 참기름 고추장 넣어서 비벼서 먹어야지. 여기까지만 생각했는데도 침이 꼴깍 넘어가서 이걸 다 어떻게 먹어치우나 하고 한숨이나 내쉬던 조금 전까지가 머쓱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거다. 나박김치도 열무김치도 모두 나보다는 그가 좋아하던 것들이다. 그가 있었다면 이거 다 어떻게 먹냐는 볼멘소리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돈 주고 사서 먹는 김치 공짜로 얻어왔으면 맛있게 먹으면 되지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고 혼이 났을 터이다. 뭐, 그 사람이 있는 곳에는 이 나박김치 열무김치보다 맛있는 것이 잔뜩 있어서 김치 생각 따위는 요만큼도 안 날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