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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 자르는 방법을 바꾼 이후로 프리지아의 수명이 확실히 좀 늘어나긴 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며칠 정도다. 이번 주 들어서면서 눈에 띄게 생기가 없어지기 시작해서, 또 이제 슬슬 다음 꽃을 사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번 후임으로 찜한 꽃은 라넌큘러스였다. 라넌큘러스 중에서도 '버터플라이'라는 품명이 굳이 따로 붙어있는 꽃이 나와있는 옵션이 있어서 간만에 한 단 정도를 주문했다. 그런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문을 한 지 이틀이 지나도 꽃은 배송이 시작된 기미조차도 없었다. 조금 마음이 다급해져 문의를 남겼다. 답변은 만 하루를 지나고 나서야 달렸다. 주문이 폭주해 배송이 다소 늦어지고 있으며 내 꽃의 경우는 빠르면 금요일, 늦으면 다음 주 월, 화 정도에 배송이 나갈 것이라고 한다. 순간 몹시 짜증이 왈칵 치밀었다. 이 꽃 하나만 보고 프리지아가 다소 시들시들해져도 버티고 있었는데.
도리 없는 일이었다. 그냥 옷을 갈아입고 집 근처 마트에 가서 노란 프리지아 한 다발을 사 왔다. 다홍색 나는 프리지아도 있긴 했지만 이 녀석은 꽃들이 너무나 활짝 피어 있어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어차피 그의 기일 전후해서 사던 꽃은 원래 노란 프리지아였고 올해는 보라색으로 바뀌었으니 그냥 노란 프리지아를 사 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금요일에 발송된다는 보장만 있으면야 눈 딱 감고 버텨 보겠지만 그것도 아니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반쯤 시든 프리지아를 계속 꽂아둬야 할 판이어서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새 프리지아를 사다 놓고 배송 날짜를 확인해 보니 역시나, 4월 21일에 배송이 나갈 예정이라고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조건 나가서 새 꽃을 사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꽃은 물류창고에 쌓여있다가 주문이 확인되면 바로 출고되는 공산품이 아니며(대개의 경우 판매하시는 분들 또한 꽃을 경매로 낙찰받아와서 배송하므로 하루 이틀 정도의 마진이 필요하다) 그래서 주문한 그다음 날 바로 배송되는 일이 드물다. 판매처에서는 대개 배송 날짜를 영업일 기준 2일 이내라고 적어두고는 있지만 꽃은 날씨가 너무 덥거나 너무 추워도 배송되지 못하며, 가끔은 화훼 시장이 단체로 휴가라거나 이런 식으로 주문이 폭주해 턱없이 배송이 밀리기도 한다. 실제로 작년 겨울엔 꽃 한 번 잘못 주문했다가 갑작스레 강추위가 닥치는 바람에 2주가 지나서 받은 적도 있다. 꽃이라는 품목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인데도 당일 혹은 다음날 배송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나도 모를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어느 아이돌의 노래를 빌자면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것처럼, 꽃 배송도 대개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급하게 사 온 노란 프리지아가 제법 예쁘게 피고 있으니 그걸로 위안을 삼아야지 뭐 별 수 있겠나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