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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8킬로그램, 반올림해서 슬쩍 과장을 하자면 10킬로그램이나 되는 김치 두 통을 짊어지고 버스까지 타고 집으로 오느라 식겁한 이야기를 며칠 전에 쓴 적이 있다.
우리 집 냉장고는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며 심지어 요즘 대부분 다 쓰는 양문형 냉장고조차도 아니다. 냉동실이 위쪽, 냉장실이 아래쪽에 붙은 아주 평범한 일반형 냉장고다. 그간은 워낙에 정리 잘하는 그 덕분에 냉장고 작다는 생각 없이 잘 썼고 고장도 나지 않은 멀쩡한 물건을 '바꾼다'는 것에 이상한 심리적인 거부감이 있어서 수명을 꽉꽉 채워 썼었고 이제 좀 우리도 남들 다 쓰는 양문형 냉장고를 써보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하던 중에 그가 떠나버렸으므로 정말로 냉장고를 바꿀 이유 따위는 더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10 킬로그램이나 되는 김치 두 통은 냉장고의 중간 선반 위를 마치 점령군처럼 차지하고 있다. 덕분에 냉장고에 공간에 없어 당분간 장은 보지 않아도 될 듯싶기도 하다.
김치를 받아온 다음날 나박김치로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건더기를 건져서 밥과 함께 볶고, 나박김치 국물을 조금 둘러 간을 맞췄다. 아무래도 김치볶음밥 특유의 먹음직한 빨간 색깔까지는 나지 않아서 고춧가루를 조금 더 뿌리긴 했다. 참치에 달걀 프라이까지 얹은 볶음밥은 아주 훌륭했고 나박김치에 들어있던 무 때문인지 어느 한식뷔페의 시그니쳐 메뉴인 깍두기 볶음밥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다음 날은 금방 한 따뜻한 밥에 열무김치를 건져다 잘게 썰어 올려서 비벼 먹었다. 비빔밥 고추장 맛있게 만드는 법을 인터넷에 따로 검색까지 해서, 고추장에 설탕 물엿 참기름을 넣고 물 대신 열무김치 국물을 조금 넣고 개어서 만든 양념을 듬뿍 올리고 계란도 하나 부쳐서 얹었다. 맛이 기가 막혔다. 언젠가 브런치에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나는 입도 짧고 채소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에 비빔밥만은 이상하게 좋아해서 그가 내내 신기해했었다. 그러고 보니 나 비빔밥 되게 좋아했었는데 나물 같은 걸 할 줄 몰라서 그간 통 못 먹고 지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레 했다.
어제는 아침부터 갑작스레 일정에도 없던 외근이 생겨서 허둥지둥 나갔다 왔다. 두 시도 넘어 집에 돌아오니 배도 고프고 밥통 속에 남은 식은 밥도 처리해야 해서 급하게 라면을 끓였다. 라면 물을 잡을 때 나박김치를 꺼내 건더기를 건져다 널고, 국물도 좀 따라 넣었다. 그렇게 끓인 라면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는데도 평소의 매운맛이 많이 가셨고 듬뿍 들어가 있는 채소들 덕분에 대단히 몸에 좋은 뭔가를 먹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주었다. 그래서 고작 3일 동안 다른 식재료를 거의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김치만 이렇게 저렇게 엮어서 밥을 먹는 데 성공했다. 아, 이래서 엄마들이 겨울 되면 김장을 하시는 거구나. 나이 50을 목전에 두고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다음 주는 월요일 미팅 말고도 나갔다 와야 할 일이 몇 가지 있다. 그 일들이 정리되고 나면 부침가루에 열무김치를 자잘하게 썰어 넣고 국물도 담뿍 넣어 반죽해서 열무김치를 넣은 김치전을 부쳐먹어 볼 생각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내 상식으로 김치전이란 배추김치로 부치는 거였지만 어차피 김치가 다 김치인데 안될 것은 또 뭐 있겠는가. 냉장고 속에 든 저 김치 두 통을 버리지 않고 무사히 잘 먹어치우고 나면 조금은 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