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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냥 친한 오빠 동생이 아닌 사귀는 사이가 되고 난 후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지금이야 집 나가면 고생이고 특히 크리스마스니 발렌타인 데이니 하는 날 쓸데없이 밖에 나갔다가는 돈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고생만 잔뜩 하다 들어오기 마련이라는 닳은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었다. 생애 처음 하는 연애에, 처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였다. 그날의 내가 얼마나 온갖 로맨틱한 꿈에 부풀어 있었을지는 굳이 두 번 세 번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짐작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순전히 그날 쓸 목적으로 용돈을 쪼개 화장품을 샀고 향수를 샀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무릎 위로 한 뼘쯤 올라가는 팔랑거리는 미니스커트도 하나 샀다. 오늘만은 좀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입고 나갈 옷이며, 화장품이며, 들고나갈 가방까지 모든 걸 다 준비해 놓고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약속 시간을 미리 정해놓지 않고 '전화할 테니까 그때 나오라'는 애매한 말을 들었을 때 뭔가를 눈치챘어야 했는데, 잔뜩 들떠 있던 당시의 나에게는 그 정도의 눈치는 좀 무리였던 모양이다.
그에게서는 하루 종일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당시엔 지금처럼 모든 사람이 핸드폰을 갖고 다니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아침에 연락이 없을 때만 해도 점심때쯤엔 전화가 오겠지 하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을 지나 오후 두세 시가 지나가자 슬슬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나름대로 정해놓은 마지노선은 오후 여섯 시였다. 최소한 만나서 밖에 나가 저녁이라도 한 끼 먹으려면 그 시간을 넘기면 곤란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을 해 놓고 나서도 나는 밤 아홉 시가 지나도록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 그리고 열 시가 조금 지나서야 나는 내 첫 연애의 첫 크리스마스에 깨끗이 바람을 맞았다는 사실을 억지로 승복했다. 나는 오늘 입고 나가려고 준비해놓았던 것들을 제대로 개지도 않고 둘둘 뭉쳐서 옷장 가장 깊숙한 곳에 아무렇게나 처박았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둘러쓰고 자 버렸다.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다음날 점심 때도 한참 지나서였다.
그가 미안하다는 말을 채 다 하기도 전에 나는 내가 어제 하루 동안 얼마나 비참한 기분이었는지를 퍼붓듯이 쏘아붙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나의 말을 다 듣고 난 후에 그렇게 말했다. 고모님이 계셔. 어릴 때 엄마 대신 날 키워주다시피 하신 분인데, 어제 갑자기 돌아가셨어. 아마 내가 오늘 여자 친구랑 데이트를 해야 하니까 하루만 늦게 돌아가셔 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했으면 아마 그 말씀도 들어주셨을 분이야.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도저히 연락을 할 수가 없었어. 머리가 멍해졌다.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두어 마디 하다가, 나는 결국 울기 시작했다. 그런 일 앞에서 고작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를 못한 걸로 화를 낸 내가 창피해서. 그런 것도 모르고 온갖 원망을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 너무 미안해서. 그날 이후로 우리는 소위 기념일이라는 걸 따로 챙기지 않기로 했다. 그까짓 날짜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그냥 하루하루 서로의 존재에 감사하면서 살자고.
그리고 오늘은 그가 떠나간 지 꼭 100일이 되는 날이다.
이 글을 다 써놓고 나는 오늘도 봉안당에 갈 예정이다. 가서 얼굴을 보고, 지난 백일 간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주절주절 중얼거리고, 이런저런 아쉬운 소리를 늘어놓고 바쁜 거 알지만 신경 좀 써달라는 '청탁'을 하고, 거기 가서도 바쁜 건 알겠지만 제발 꿈에라도 한 번 다녀가라고, 얼굴 잊어먹겠다는 볼멘소리를 좀 하고 돌아오려고 한다. 당신이 이제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거라면 차라리 시간이 아주 빨리 흘러가서 당신을 만나러 갈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도.
나는 잘 지내고 있다고. 너무 멀쩡히 잘 지내서, 미안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