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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극히 문과형의 인간이다. 아울러 MBTI에서는 계획과 논리, 이성 따위와는 정반대로 척을 지고 있다는 INFP를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남들이 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고등학교 3학년 진로상담에서도 나는 별다른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네가 성적을 더 올릴 만한 과목은 수학밖에 없는데 너도 알겠지만 이제 와서 수학 성적을 올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냥 지금 성적 유지하고 이 성적에 맞는 대학으로 진학하자는 것이 담당 교과가 수학이던 당시 담임교사의 말이었고 나도 그 말에 크게 동감했기 때문이다. 대학을 가서도 가장 기뻤던 것 중의 하나가 그놈의 수학을 다시는 안 해도 된다는 점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런 요즘 말로 '문송한' 인간이 생각하기에도 가끔 수 혹은 수의 이치라는 것은 놀랄 만큼 신비한 데가 있다. 수학은 우주의 신비를 써 놓은 언어라고 갈릴레이가 말했다는데 정말 그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누리는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이 '발명'한 것이겠지만 수와 수리, 그리고 그로 인해 파생된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스스로(自) 그러했던(然) 것들을 인간이 '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인 게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다다르면 수학이란 어찌 보면 그야말로 이 세계를 구성하는 어떠한 섭리 그 자체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브런치에 올렸던 글대로, 어제는 그가 떠난 지 백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오늘은 101일째가 되는 날이다.
1 다음이 2이고 2 다음이 3이라는 것은 어려서부터 세뇌당하다시피 들어온 사실이라 별로 이채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의미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100이라는 딱 떨어지는 숫자 뒤에 101이 옴으로서 내가 보내고 있는 날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도, 또 다른 시작이라는 의미도 주고 있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다. 100이라는 숫자뿐만이 아니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날들 내내 1000일 다음에는 1001일이 올 테고 2000일 다음에는 2001일이라는 숫자가 올 테지.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삶을 계속하면서도, 또다시 시작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나를 그에게로 떠밀어주지 않을까. 그런 거라면, 요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 버린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그가 어디 먼 곳에 출장이라도 가 있고 나는 혼자 집을 보면서 그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자기 합리화도 사실에서 영 벗어나 있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스모스'에 나오는 말에 의하면 전 우주의 생애를 1월 1일 오전 0시 0분 0초에서 12월 31일 오후 11시 59분 59초까지로 잡았을 때 인간의 수명은 고작 4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들은 내게는 죽을 만큼 힘들지만, 한 발만 떨어져서 바라보면 실은 그렇게나 짧은 찰나의 순간이 아닐까.
그의 삼우재를 치르던 날 나는 혼자 남은 이 세상을 꼭 9834일 동안만 더 버텨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제 9734일이 남았다. 9834라는 이 카운트다운은 그 숫자가 너무 크고 애매해서 사실 카운트다운이라는 의미가 과연 있기는 한가도 싶다. 그 안에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겠고 무언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 내 인생의 궤도가 바뀔 수도 있겠지.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100 다음에 101이 오는 이 무난하고 평범한 세상을, 나 또한 그렇게 무난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 마음으로, 101일째의 오늘을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