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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열아홉 살에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내게는 첫사랑이었다. 물론 초등학교 시절 혹시나 너 혹시 누구누구 좋아하냐는 말이라도 들을까 봐 괜히 더 큰 소리를 내 가며 싸우던 동급생 남자아이도 하나 있었고 괜히 그 책상에 음료수며 간식거리를 몰래 갖다 놓던 선생님도 있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내 기억 속에 제대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정의된 감정을 가지고 대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점 부끄럼도 없이 내 첫사랑은 당신이라고 그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다. 물론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래서 그에게 나는 첫사랑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가 떠나간 후 그와 처음으로 사귀기 시작하던 무렵의 일을 종종 떠올리곤 한다.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새롭고 신기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무거운 전공책이 가득 든 가방의 무게에 낑낑대고 있으면 그는 당연하다는 듯 내 가방을 빼앗아다 자기 어깨에 짊어졌다. 그의 수업이 마치기를 기다리며 강의실 앞을 서성거리던 것, 손을 꼭 잡고 마치 어린애들처럼 맞잡은 손을 한껏 앞뒤로 흔들려 비탈진 학교길을 걸어 내려오던 것, 할 일이 없는 주말 학교 앞 만화방에서 슬램덩크 전질을 빌려다가 각자의 가방 두 개에 나누어 담고 빈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 하루 종일 만화책을 보던 기억 같은 것들. 오랫동안 잊고 지내 그런 일도 있었지 싶은 기억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본다. 그 무렵의 나는 모든 것들이 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다이어리에 별의별 것들을 다 체크해 써 놓았었다. 오늘은 학교 앞 무슨 식당에 처음 같이 가 본 날, 오늘은 처음으로 같이 수업을 땡땡이치고 놀러 간 날, 오늘은 처음으로 싸우고 각자 점심을 먹은 날 등등.
그리고 나는 그 노릇을 근 30년이 지나간 요즘 다시 하고 있다.
그가 떠나간 후 한동안은 그저 숨 쉬고 살아있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건지 확신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한동안 내가 하는 일들은 '그도 내가 자기를 따라오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전제 하에서야 가능한 것들에 국한되었다. 숨 쉬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그냥 살아있는 것. 그 외의 모든 것들은, 마치 게임의 퀘스트를 깨듯 하나하나 확인이 필요했고 '해금'이 필요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웃는 것, 음악을 듣는 것, 나 혼자 먹을 커피를 갈아서 내리는 것, 뭔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 등등. 그의 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하던 것들을 지난 넉 달간 나는 나 스스로에게 하나하나 승인을 얻어가면서, 마치 예전에 다니던 회사에서 비품 하나를 구입하고도 지출결의서를 올려 도장을 받던 것처럼 과연 지금의 내가 이런 것을 해도 되는지, 내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를 일일이 따져가며 하나씩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적지 않은 행위들이 그 '승인'을 얻지 못해서 그가 떠난 후 하지 않고 있다. 혼자 영화를 보는 것이라든가, 어딘가로 놀러 가는 것이라든가, 밖에 나가 밥을 사 먹고 들어온다든가 하는 것들처럼.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요즘 나는 인생을 사는 방법을 1장 1절부터 다시 배우는 느낌마저 든다.
어제는 유튜브에서 뭔가를 찾아보느라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세 시도 넘은 시간이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그의 부재에 대한 슬픔과 상심 때문이 아닌 다른 일로 이렇게까지 늦게 깨어 있어 본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다. 이래서 나는 어제 또 하나의 해금을 한 셈이다. 그 시간에 자고도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여섯 시에 눈이 떠졌고, 그래서 아마 오후 서너 시쯤에는 밀려드는 졸음 때문에 사투를 벌일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젠 정말 혼자서도 잘해야 한다. 아주 오랫동안 뭐든 같이 하던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건 그런 뜻이다. 때로는 방법을 모르고 때로는 이게 해도 되는 일인지 아닌지, 이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 구분하는 것조차 쉽지 않지만 그래도 이젠 그래야 한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흘러도, 사랑이 지나가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