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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 환기를 좀 하려고 창문을 열어놓은 그 잠깐 사이에 비가 들이쳐 엉망이었다. 별 수 없이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켰다. 어제는 딱히 밖에 나갈 일도 없어서 집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로서 나는 외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지하철 역이 침수돼 출근 대란이 일어나고 안타까운 인명사고가 연달았다는 사실조차도 나중에야, 포탈의 메인에 걸려 있는 뉴스 제목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렇게 어제 하루 동안 나는 온전히 혼자만의 세상에 침잠해 있었다.
벌써 몇 달째 보고 있는 지나간 예능 방송 VOD에서 감자전 이야기가 나왔다. 아, 감자전 맛있겠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 어제 비가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비가 오면 전 종류를 먹고 싶어지는 건 그냥 그런 것만은 아니고 뭔가 복잡한 과학적인 기제가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긴 한데,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실로 몇 달만에 능동적으로 뭔가가 먹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넉 달간 내가 느낀 식욕의 최대치는 다른 것을 사러 편의점이나 슈퍼에 갔다가 마침 눈에 띈 뭔가를 보고 저거나 좀 해 먹을까 정도의 생각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생물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그 욕구는 내게는 조금 생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그는 하루 날을 잡고 대대적으로 전을 부쳤다. 김치전, 감자전, 부추전, 호박전, 육전 등등의 메뉴들 중에 보통 한 세 가지 정도를 부쳤는데 한 번 부칠 때 수북하게 부쳐놓고 냉동실에 싸 넣어놓고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꺼내 반찬으로 먹었다. 물론 전이란 다 부쳐서 정식으로 밥상머리에 놓고 먹는 것보다 간을 본다는 핑계로 중간에 한 장씩 집어먹는 것이 더 별미인 법이라 고생해 가며 전을 부치고 그 부친 전을 반찬으로 밥을 먹으면서는 거의 예외 없이 기름 냄새를 너무 많이 맡아서 그런가 별로 맛있는 줄도 모르겠다는 말을 주고받았던 것 같다.
원래 짜 놓은 식단에 의하면 어제는 콩나물국이나 간단하게 끓여서 대충 먹을 예정이었다. 그러려고 일부러 콩나물도 한 봉지 사다 둔 참이었다. 그러나 한 번 머릿속에 자리 잡은 감자전에 대한 식욕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해 먹자.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마침 우리 집에는 그가 떠나고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질렀는지 알 수 없는 5킬로그램짜리 감자가 반 이상 남아 있었으므로.
마음을 먹은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대번 내게는 얼마만 한 감자를 몇 개 갈면 전이 몇 장이나 나오는지에 대한 감각부터가 없다는 걸 알았다. 대충, 중간 크기 감자를 네 개 정도 집어다 껍질을 까고 믹서기에 갈았다. 전분을 몇 스푼 넣고 섞어서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한 국자씩 떠 넣고는 대충 테두리가 갈색으로 익으면 뒤집었다. 그렇게 부친 감자전은 딱 어지간한 팬케이크 크기로 네 장이 나왔다. 감자 한 알당 한 장 정도가 나오는 모양이다.
부쳐진 네 장의 감자전 중 제일 예쁘게 부쳐진 것 하나를 접시에 담아 그의 책상에 갖다 놓았다. 맛은 보장 못해. 그렇게 말하고는 웃었다. 내가 부친 감자전은 제법 쫀득하기는 했지만 바삭하지는 않았다. 간을 너무 하지 않아서 그런지 간장을 찍지 않고 먹기는 많이 싱거울 것 같았다. 내가 그렇지 뭐.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콩나물국까지 곁들인 한 상을 맛있게 먹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밥과 국과 반찬까지를 다 갖춰놓고 먹은 끼니였다.
그는 떠났지만 나는 살고 있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감자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