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사장님에게서 꽃병에 물을 조금만 담는 거라는 팁을 듣고 난 후 그의 책상에 꽂아둔 꽃들의 상태는 비약적으로 좋아졌다. 똑같이 일주일을 가도 예전엔 그래도 이왕 산 꽃이니 일주일은 보자는 기분이었다면 요즘은 억지로 보면 하루 이틀 정도는 더 꽂아놓을 수 있는데도 그냥 내가 바꾸는 것에 가깝다. 다른 보존액을 탄 것도 아니고 심지어 설탕이나 락스를 타는 것 같은 꽃을 오래 보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를 한 것도 아닌데 꽃병에 물을 담는 양을 조절하는 정도로 이렇게까지 꽃의 수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건 참 놀라운 일이다.
어떤 꽃을 사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딱히 정해놓은 기준은 없다. 꽃이란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화려하면 화려한 대로, 수수하면 수수한 대로 나름의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정도 고려하는 것이 있다면 두 번 연속 같은 꽃을 사지 않는다는 것과 두 번 연속 같은 색깔의 꽃을 사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나는 파란색 계통을 좋아하고, 그래서 생각 없이 집어 든 꽃이 대개 파란색이나 청보라색 계열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빨강이나 분홍, 노란색, 흰색 계통의 꽃들을 섞어서 사려고 애쓰고 있다. 겨우 그 정도가 꽃집에 가서 꽃을 고르는 나의 빈약한 기준이다. 꽃말은 꽃을 사 와서, 꽃병에 꽂아놓고 그에게 보고를 하기 직전에야 찾아본다. 그런데 꽃말이 나쁜 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대표적인 꽃말이 나쁘더라도 분명히 좋은 꽃말도 한두 가지쯤은 병용헤서 쓰이게 마련이니까. 파란 수국의 대표적인 꽃말은 '냉담'이지만 '사려 깊음' 같은 꽃말도 같이 쓰이는 것처럼.
7월 말쯤에 장미를 샀었다. 흰색이면서 꽃잎의 가쪽으로 가면 샐먼 핑크색이 연하게 올라오는, 색깔이 오묘한 장미였다. 그 장미가 수명을 다할 무렵 사 왔던 꽃은 핑크색 리시안셔스였다. 리시안셔스는 꽃을 사다 놓기 시작한 아주 초창기 무렵 보랏빛이 나는 것으로 한 단 사다가 꽂아두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딴에는 봉오리가 많이 맺힌 것으로 골라서 사 왔었지만 정작 그 봉오리들은 채 피어보지도 못한 채 목부터 꺾어서 시들어버렸다. 관리만 잘하면 2주일도 가는 꽃이라던데 왜 이렇게 빨리 시드나 하고 속상해했던 기억이 선하다. 그래서 리시안셔스도 꽃병의 물을 줄이면 조금 오래가는지 그 점이 궁금했다. 그리고 과연 그랬다. 조롱조롱 맺혀 있던 봉우리들은 집으로 가져온 지 2, 3일 만에 제각기 다른 타이밍에 하나씩 부풀어올라 개화하기 시작했다. 날짜가 지나면서 한 송이씩 목이 꺾이며 시들기는 했지만 최소한 피지도 않고 시드는 꽃은 없었다.
원래라면 월요일쯤 새 꽃을 사 오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이번 주 월요일은 휴일이다. 꽃집이 문을 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의 책상에 시든 꽃을 놓아두고 싶지 않아, 아직 리시안셔스가 이틀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새 꽃을 사다 놓고 생기가 조금 빠졌으나마 아직 수명이 남은 리시안셔스는 그냥 내 책상에 갖다 놓기로 했다. 역시나 이번에 꽃을 고르는 기준도 딱 두 가지였다. 리시안셔스나 장미가 아닐 것. 핑크색 계통이 아닐 것. 그 조건에만 만족한다면 어떤 꽃이든 좋았고, 지금껏 사 본 적이 없는 꽃이라면 더욱 좋을 터였다.
그러나 꽃집 문을 열고 들어가 사장님과 눈인사를 하고 쇼케이스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나는 구석에 꽂혀 있던 연보라색 장미에 시선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다른 꽃을 보려고 해도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끌려갔다. 아니 이렇게까지 눈이 가는데 억지로 안 사는 것도 웃기는 일이다 싶어 결국 그 연보라색 장미를 사기로 결정했다. 예쁘죠. 유독 가시가 많은 장미의 줄기를 손질하며 사장님은 웃으셨다. 저도 꽃 떼러 갔다가 딱 보고 색깔이 너무 예뻐서 그냥 홀리듯이 사 왔잖아요. 사람 보는 눈은 다 똑같은가 봐요.
집으로 가져와서 꽃병에 꽂아 놓고 비교해 보니 원래 있던 리시안셔스가 흰색 70에 빨강이 30 정도 섞인 색깔이라면 새로 사 온 장미는 흰색 70에 보라색이 30 정도 섞인 색깔이었다. 이렇게까지 느낌 비슷한 색깔로 사 올 마음은 없었는데. 그러나 뭐 이렇게까지 예쁘니 일부러 안 사 올 수는 없었다고, 새로 꽃을 꽂은 꽃병을 책상 위에 갖다 놓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것도 참 웃기고 바보 같은 짓이잖아, 하는 변명과 함께.
어제 사온 장미의 종 이름은 '블루칩'이라고 한다. 다음번엔 정말로, 좀 쨍한 색깔이 나는 장미 아닌 다른 꽃을 사다 놓아야지. 그런 생각을 한다. 인생 다 그렇듯 꽃집에 가서 꽃을 사는 것조차도 가끔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