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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06. 2022

용담 꽃을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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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상담을 받으러 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상담을 하러 다닌 지 약 5개월 만에 처음으로 가기 싫다는 생각을 했다. 비가 오고 있어서였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내 정신건강이 조금은 나아졌다는 의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창문으로 내다본 거리에는 그칠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비가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아, 가기 싫다. 그런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실제로 나는 그냥 전화를 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날짜를 미룰까 하는 생각도 했다. 5개월간 상담을 하면서 선생님의 사정으로 상담 날짜가 바뀐 적이 서너 번쯤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별다른 불평 없이 그걸 받아들였으니 이제 나도 한 번쯤 그래 봐도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마도 꼭 나가야 할 다른 용건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다른 용건이란 다른 게 아니라 새 꽃을 사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책상에 생기를 잃어 처지기 시작한 꽃을 꽂아두고 싶지는 않았고, 그 마음은 최소한 이 궂은 날씨에 집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게으름을 부리고 싶다는 내 욕구를 이길 정도는 되었다.


오늘 같은 날씨에, 이미 젖은 우산을 접어서 가방 속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굳이 크기도 작은 접는 우산을 들고나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장우산을 꺼내 들었다. 이 우산은 그가 예비용으로 차 트렁크에 싣고 다니던 것으로, 그의 사진과 함께 차에서 꺼내 온 물건이다. 비 오는 날이었고, 그래서 나는 일부러 상담소에서 멀리 떨어진 정류장에 내려 10분 정도를 걸어가던 호젓한 시간을 포기하고 상담소에서 가장 가까운 정류장으로 가는 다른 노선 버스를 탔다.


상담을 마치고 나와서도 비는 같은 페이스로 계속 내리고 있었다. 이제 이 비를 뚫고 집에서 버스 정류장으로 두 코스쯤 앞에 내려서, 꽃집까지 걸어가서, 꽃을 사들고 집으로 걸어갈 걸 생각하니 아득해졌다. 그래서 나는 잔머리를 조금 굴려서 상담소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혹시 입점해 있는 꽃집이 없는지를 찾아보았다. 없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역시 그랬다. 이걸로, 나는 편하게 여기서 꽃 한 다발을 사 들고 버스를 타서 집 앞 정류장에 내려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면 될 참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한 잔머리였다.


그러나 그렇게 찾아간 꽃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인지라 식사 때문에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전화를 할까 하다가, 나는 아마도 편치 않은 기분으로 식사 중일 그 얼굴 모를 직원의 얼마 안 되는 자유 시간을 빼앗지 않기로 했다. 가게 앞에 놓인 화분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꽂혀 있는 가드닝 픽을 읽어보며, 아 이게 올리브 나무고 저게 여인초구나 하는 나름의 현장학습을 하고 있는 중에, 저만치서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저만치서부터 연신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며 식사 중이었다고, 기다리시게 해 드려 죄송하다고 하는 모습이 딱했다. 아마 같은 직원 중에 누군가가 꽃집 근처를 기웃거리는 나를 보고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의 책상에 둘 꽃을 사기 위해 가는 동네 화원의 꽃들은 소박한 편이다. 그러나 조금 번잡한 동네의 마트에 입점해 있는 화원이라 그런지 조금 화려한 꽃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알록달록한 꽃들 중에서 대번 내 눈길을 끈 것은 가장 앞줄의 중간에 꽂혀있는 보라색의 꽃이었다. 이 꽃은 이름이 뭔가요? 용담이라고 하는데요. 색깔이 너무 예쁘지요. 용담이라는 꽃은 이름은 알고 꽃말은 알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주저 없이 용담을 한 묶음 샀다. 집에 가서 그냥 꽂아놓을 거니 거창한 포장은 안 해주셔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고 했다. 직원분은 쇼케이스에서 동그란 잎이 달린 길쭉한 줄기 하나를 꺼내 같이 포장해 주셨다. 유칼립투스라고 했다. 그것 역시도 이름은 알았지만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신문지로 포장한 용담 한 다발을 들고 나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바깥에는 바람이 섞인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내 손은 두 개밖에 없었고, 나는 그 두 개밖에 없는 손으로 우산을 들어야 했고 처음 만져보는 용담의 가느다란 꽃대도 혹시나 꺾일세라 조심스레 들어야 했으며 저만치서 타야 할 버스가 오는 기색이 보이자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어야 했고 급하지도 않은 용건으로 걸어대는 갑의 전화를 응대해야 했다. 그 와중에 오늘 가져온 장우산은 자루가 일자로 생긴 물건이어서 손목에 걸거나 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대충 둘둘 말이 종아리 사이에 끼웠다. 순식간에 옷이 척척하게 젖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건 더 쉽지 않았다. 우산은 거치할 데가 없어서 손에 들어야 했고 남은 한 손으로는 꽃도 들어야 했지만 뭔가를 붙들기도 해야 했고, 버스 카드도 태그해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내 몰골을 본 버스 기사님이 조금 여유 있게 버스를 세워 주셔서 나는 아주 천천히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빨리 집에 가서 이 꽃이 시들기 전에 꽃병에 꽂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집에 오는 내내 마음이 조급했다. 비를 맞아 홈빡 젖은 옷을 갈아입기도 전에 나는 포장한 신문지를 풀어내고 허겁지겁 꽃대를 손질에 꽃병에 꽂았다. 이 빗속에 비 맞으면서 안 걸어오려고 거기서 꽃을 사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집 앞에 와서 살 걸 그랬다며 한참을 웃었다. 내가 그렇지 뭐. 내가 잔머리 굴리면 늘 결과가 이런 식이잖아. 그래도 꽃이 예쁘니까 됐지 뭐. 그리고 이제 이 비 그칠 때까지는 정말 집 밖에 한 발짝도 안 나갈 거니까. 늘 그랬듯, 나는 또 그런 식으로 내가 한 삽질을 적당히 합리화했다.


보라색 꽃은 제법 오랜만에 사는 것 같다. 길쭉한 이파리 사이로 차근차근 영근 봉오리들이 조금씩 개화하고 있는 걸 지켜보고 있자니 어제의 그 개고생은 뭐 한 번쯤은 해볼 만한 일이었던 듯이 그렇게 여겨지기도 한다. 유칼립투스 한 줄기를 같이 넣어준 직원 분의 센스 덕분에 조금 더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이젠 날씨도 많이 서늘해졌으니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오래 우리 집에서 살아남아주기를 바라본다.


용담의 꽃말은 '그대가 슬퍼할 때 나는 사랑한다'라는, 조금은 씁쓸한 문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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