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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Sep 29. 2022

제 버릇 개 주기

-170

요즘 일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틀어놓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다양한 패널들이 책 한 권씩을 소개해주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실은 이미 한 번 다 본 것이지만 딱히 틀어놓을 후임 프로그램을 찾지 못해 틀어놓고 있다. 스쳐 지나가듯 본 한 에피소드에서 MBTI가 검사를 할 때마다 바뀌는 것은 MBTI가 성격 자체보다는 요즘 내가 사회적으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느냐가 더 잘 반영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다고만 하기에는 내 MBTI는 상당히 납득이 가는 편이고, 나는 몇 년째 같은 결과를 받고 있기도 하다. 내 MBTI는 INFP이고, 이 말인즉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성격의 인간이라는 말이 된다. 사실이다. 나는 극도로 집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며,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이런 기질은 더욱 강화된 것 같다.


그런 내게 하루 동안 걸어 다닌 거리가 10킬로미터가 넘는 어제 하루는 참 견디기 힘든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헤야 할 일을 모두 마치고, 나는 녹초가 된 채로 마지막 일을 보기 위해 동네 주민 센터에 들렀다. 필요한 서류 몇 장을 떼기 위해 신청서에 이름과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을 쓰고 있는데, 몹시 불쾌한 감각이 치밀었다. 이유는 종이 위에 '그려지는' 내 글씨체였다. 이게 무슨 일인지, 하루에 한 시간씩을 들여 쓰고 있는 펜글씨가 무색하게 신청서의 빈칸을 채운 내 글씨는 예전에 비해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옛날 글씨 그대로였다. 우선은 필요한 서류를 급하게 떼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나는 일단 창구로 가서 담당 공무원에게 신청서를 내밀었다. 예전에는 이런 경우에, 흔히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휘갈겨쓴 몇몇 부분을 따로 확인받는 일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도 그랬다. 나는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0과 헷갈리게 쓴 6이라든가 8과 헷갈리게 쓴 3이라든가 하는 몇몇 부분을 확인해 준 후, 떼어진 서류 몇 장을 들고 주민센터 밖으로 나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나는 피곤한 다리의 통증을 싹 잊을 정도의 당혹감에 시달렸다. 왜 그러지. 왜 그러는 거지. 한동안 안 그랬는데.


요즘도 나는 매일 여섯 시가 되면 하던 일을 정리해놓고 A4 다섯 장 분량의 펜글씨를 쓴다. 다 쓰고 나면 네 장은 버리고 한 장만 남겨서 파일에 모아놓는다. 한 장에 일주일치씩을 보관하는 그 파일철은 이제 예닐곱 페이지만 더 채우면 한 권을 다 쓰게 된다. 두툼해져 가는 파일을 보며, 참 끈기 없고 싫증 잘 내는 내가 뭔가를 이렇게 꾸준하게 할 수도 있구나 하는 사실에 작은 뿌듯함을 느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가서 육필로 뭔가를 써야 할 때,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반듯해진 필체에 흐뭇해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금 귀신같이 되살아나 히죽 웃는 얼굴로 내 뒤를 따라온 공포영화의 살인마 같은 내 옛날 글씨를 다시 보게 되다니. 당황스럽고 허탈했고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악필을 교정하려 애쓰시는 분들 중에 '아직도 글씨를 조금만 빨리 쓰면 옛날 글씨가 그대로 나온다'는 푸념을 하시는 분들이 더러 계셨다. 그리고 그분들은 다 최소한 나보다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이상 길게 노력하신 분들이셨다. 그런 글들을 보고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내겐 아직 시간과 연습이 모자란 것뿐이니까. 안 된다는 게 아니니까.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니니까. 일단 안심을 하고서도, 그간 하루에 한 시간씩 들인 그 시간들이 어째 통으로 엿 바꿔 먹어버린 듯한 찜찜한 기분에 어제는 글씨를 쓰는 내내 그의 사진 액자를 향해 이거 효과 있긴 있는 거냐고 투덜거렸다. 사진 속의 그는 그냥 말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제 버릇은 개를 주기가 상당히 어렵다. 나쁜 버릇일수록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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