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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01. 2022

안개 속에서 2분 더

-172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창문을 열었다가 창밖을 틀어막은 안개의 기세에 놀러 헉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는 나날이 며칠 째 계속되고 있다. 그저께쯤이 제일 심했던 것 같은데 오늘 아침도 만만치 않다. 방충망 너머로 보이는 안개의 입자는 마치 아주 가느다란 실비가 내리고 있는 듯한 착시마저 불러일으켜서, 나는 벌써 몇 번이나 반신반의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충망을 열고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비가 오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위가 어슴푸레하게 밝기 전도 마찬가지다. 새벽의 순전한 어둠과, 안개가 낀 어둠은 분명히 그 색조가 다르다. 전자가 아주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있는 기분이라면 후자는 아주 두껍고 푹신한 뭔가에 둘둘 감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똑같이 앞이 잘 보이지 않아도, 사람의 시각은 어둠으로 인한 것과 안개로 인한 것을 민감하게 구분해 내는 모양이다. 희뿌연 새벽안개에 휩싸인 동네의 풍경은 매우 낯설고, 다소 이국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뿌연 창밖의 풍경에 넋을 빼앗겼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어제 넘겨놓은 달력의 그림이 낯선 것을 발견하고서야 오늘부터 10월이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나는 달력을 숫자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달력의 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한다. 그래서 머릿속에 박혀버린 지난달의 '배열'과 조금 달라진 이번 달의 '배열'이 아직은 살짝 낯설다. 그러나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이번 달도 내게는 해야 할 마감과 받으러 가야 할 상담과 기타 등등의 일정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나는 아마 싫어도 바뀐 숫자의 배열에 빨리 적응하게 될 테니까. 그래도 이번 달은 장장 두 번이나 월요일에 빨간 칠이 되어 있어서 그것 하나만은 좋은 일이다.


10시가 넘으면 꽃집에 가보려고 한다. 지난주 사다 놓은 과꽃은 아직은 생생하긴 하지만 다음 주 월요일이 휴일이라 그때까지도 그럴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점심 때는 어제 참치마요 덮밥을 해 먹고 남겨놓은 밥을 라면에 말아서 대충 먹고 치우기로 한다. 오늘 끓여먹을 라면은 내 입에는 조금 매워서 계란이라도 하나 풀어야 하려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사다 놓은 요거트는 오늘까지 먹으면 끝이지만 내일쯤엔 마트에서 배송이 올 테니 그걸 먹으면 될 것이고. 생수도, 쌀도 같이 주문했으니 당분간은 집에 쌀 떨어지고 물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짙은 안개를 뚫고 10월이 왔다. 11월도, 12월도, 내년도, 내후년도 올 것이다. 나는 아마도, 그 시간들을 이렇게 꾸역꾸역 살아갈 테지. 어차피 그럴 테니까, 지금은 이 안개 속에서 조금만 더 멍을 때려보기로 할까. 2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도 그렇게 생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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