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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02. 2022

한 걸음 뒤에서

-173

이 브런치에 들러 내 남루한 글타래들을 매일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으로 비쳐지고 있을지, 그런 것들이 간혹 궁금할 때가 있다. 착하고, 다정하고, 꼼꼼하고, 아내에게 더없이 헌신적이었던 사람 정도일까. 물론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람이었고 그에게도 내가 끝까지 마냥 좋아만 할 수 없었던 몇 가지 지점들이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일정에 집착하는 성격이었다.


내 상식 하에서 '일정'이란 다른 무언가를 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리하는 일종의 부수적인 작업이었다. '일정을 짜기 위해' 따로 시간을 빼거나 골머리를 썩이는 짓을 나는 구태여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매주 초, 매월 말 따로 시간을 내 일정을 정리했다. 그 일정이라는 것에는 여러 가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일 밥은 무슨 식재료를 가지고 무엇을 해 먹을 것인지, 저녁에 간식으로 먹는 빵은 이번엔 어디에 가서 무엇을 사 와서 언제쯤 먹을 것인지, 개봉 때 놓친 무슨무슨 영화가 언제 방송되니 챙겨봐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 전부 포함된, 일종의 살아가는 밑그림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렇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꼼꼼하게 미리 짜 두려고 하다 보니 그 일정에는 자연스럽게 많은 변수가 포함되었고, 그래서 그 일정이 어그러질 때마다 그는 투덜거리며, 가끔은 왜 저래 싶을 만큼의 짜증을 내며 엉켜버린 일정을 다시 정리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가끔 살기 위해 일정을 짜는 게 아니라 일정에 맞추기 위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나는 그의 그런 성격을 내심 피곤해했으며. 좀 안 저러면 안 되나 하고 늘 생각했다.


그가 홀연히 떠나고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지 어영부영 반년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나 귀찮아했던 일정이라는 걸 일주일 단위로 짜 놓고 매일매일 그걸 적당히 고쳐가며 살고 있다. 마치 그가 했듯이. 키워야 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하나 먹고사는 것이 전부인 이 조촐하다 못해 소슬하기까지 한 일상을 꾸려 나가는 것에도 계획은 필요하다. 냉장고에 넣어놓은 식재료들에는 제각기 유통기한이라는 것이 있으며 귀찮다고 삼시세끼 라면만 끓여먹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기상 시간이 당겨진 덕분에 턱없이 길어진 아침을 쫄쫄 굶지 않고 보내려면 최소한 두유 정도는 떨어뜨리지 않고 사다 놓아야 한다. 이런 필요성들이 나를 캘린터 페이지 앞으로 떠민다. 그리고 안 하던 짓을 하려다 보니 그 과정에서 나는 크고 작은 실수를 매번 한다.


내가 오늘 점심때 먹겠다고 일정에 적어 놓은 음식은 하이라이스다. 본래라면 집 앞 슈퍼에 가서 하이라이스 분말 한 봉지만 사 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양파도 떨어졌고 파도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며칠 전 마트에 주문을 하면서 별생각 없이, 저녁때쯤 공복을 달래기 위해 먹는 요거트가 떨어지는 오늘 오후 4시까지 배송받는 일정으로 주문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오늘 4시에 오는 마트 배송에서 하이라이스 분말과 양파를 갖다 주기 전까지는 오늘 점심을 먹을 수 없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인간아, 인간아. 왜 그러고 사니. 그렇게 정신줄 놓고 살면 뭐가 재밌니. 나는 오늘 아침에 그 말을 수도 없이 되풀이하며 식단 일정을 바꾸었다. 그러나 이틀 단위로 촘촘하게 물려 있는 식단을 밀고 당기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오늘 해 먹으려던 하이라이스를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그냥 감자나 적당히 삶아서 먹는 것으로 점심 한 끼를 때워야 한다. 그 번잡한 작업을 하면서야 나는 그가 왜 일정을 그렇게 열심히 짰었는지, 그리고 그 일정이 어그러지면 그걸 다시 정리하면서 왜 그렇게 짜증을 내곤 했었는지를 어렴풋이 이해한다.


나는 늘 이런 식으로, 한 걸음 뒤에서 그 사람을 따라가기만 한다.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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