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Oct 04. 2022

감자칼의 동병상련

-175

나는 뭔가를 썰다가 부엌칼에 손이 베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워낙 겁이 많은 성격이기도 한 데다가 아무래도 뭔가를 써는 것에 그렇게까지 능숙하지 않다 보니 조금 천천히, 조심해서 썰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부엌칼에 손을 다치는 일은 나보다는 오히려 그쪽이 조금 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천적은 따로 있었다. 감자 껍질 벗길 때 쓰는 필러였다. 그가 옆에서 다른 뭔가를 하는 동안 감자 껍질 까는 거라도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가 필러의 날에 손톱이 날아가는 일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당했고, 깜짝 놀라 손끝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는 뭘 어떡하면 감자칼에 손톱을 날려먹냐며 나를 밀어내고 남은 감자들의 껍질까지 자기가 다 깠다. 이 이야기를 듣는 다른 사람들도 대개 반응이 비슷해서, 나는 세상에 감자 깎다가 감자칼에 손톱 날려먹는 인간은 아마 나뿐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다.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뒤늦게 배송받은 하이라이스 가루를 꺼내놓고, 몇 개월 만에 하이라이스나 한솥 끓여놓고 한 서너 번을 먹을 참이었다. 집에 없다는 핑계로 본래부터도 썩 좋아하지 않았던 당근은 생략하고, 양파와 감자, 고기 약간을 넣고 끓여놓을 참이었다. 들어가는 감자는 내 주먹만 한 것으로 한 개면 충분했다. 그런데 그 감자 한 개의 껌질을 까다가, 나는 또 간만에 필러의 날에 손톱을 날려먹고 말았다. 깜짝 놀라 깎던 감자를 떨어뜨리고 손끝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손톱이 사선으로 잘려나갔을 뿐 다친 곳은 없었다. 다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특유의 불쾌감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다. 이건 쇠로 된 것도 아닌 주제에 이럴 때만 날카로운 척한다고, 나는 애먼 감자칼 탓을 한참이나 하며 겨우 남은 껍질을 다 벗기고는 방으로 들어가 날카롭게 잘려나간 손톱 끝을 줄로 갈았다.


그러고 보니 그 감자칼은 본래 식도와 한 세트로 나온 것이었다. 수년 전 세라믹 식도가 대대적으로 유행할 때 예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가 우리도 저 칼 한 번 써보자고 우겨대서 샀던 물건이었다. 세라믹 식도의 첫인상은 '이거 정말 뭐 썰리긴 하냐'는 것이었다. 칼이라는 물건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날카로움과 위압감이 사라진 세라믹 식도는 정말 무슨 장난감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첫인상에 비해서는 굉장히 잘 썰리고 잘 잘려서 그와 나는 한동안 칼로 뭔가를 썰 때마다 신기해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칼 들고 강도질은 못 하겠다. 이런 거 들고 꼼짝 마! 하면 겁먹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웃었었다.


세라믹 식도의 불편한 점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에 있었다. '함부로 갈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모든 칼이 다 그렇듯 그 세라믹 식도도 서서히 날이 무뎌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날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내리누르는 사람의 힘으로 뭔가를 썰어야 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날의 중간에는 미세하나마 날이 빠진 부분도 생겼다. 칼 좀 바꾸자는 말을 꺼낸 지 몇 달이 지나도 그 특유의 생각 많음 때문에 선뜻 칼을 고르지 못하는 그를 대신해 나는 검정색 블록에 용도별로 조금씩 다른 칼이 다섯 자루 꽂혀 있는 적당한 식도 세트를 불문곡직 사서 그에게 들이댔고 그는 그제야 그 낡은 세라믹 식도를 버렸다. 그리고 어제 내 손톱을 날려먹은 그 필러는 그 세라믹 식도와 함께 들어있던 물건이었다. 아. 그랬었지. 손톱을 갈다가 문득, 그 필러가 어디서 난 물건인지가 떠올라 나는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칼은 버린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 쟤는 그래도 아직 현역이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혼자 남은 감자칼의 신세가 나와 퍽 비슷한 것 같아 한참을 씁쓸하게 웃었다.


참, 큰일이다. 아무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모든 생각의 마지막이 다 그에게로 향해서야. 껍질을 다 깎은 감자를 썰면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버린 그 세라믹 식도를, 그리고 아직도 싱크대 서랍 속에 들어있는 녀석과 한 세트였던 감자칼을 생각했다. 하이라이스가 끓는 내내.



매거진의 이전글 노란 꽃은 언제나 옳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