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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06. 2022

여름 내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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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난봄부터 떨어온 갖은 청승을 쭈욱 지켜봐 오신 분들이라면 지난여름 온갖 삽질 끝에 비싸지도 않은 선풍기 한 대를 장만한 것을 알고 계실 것이다. 나는 그 선풍기를 지난여름 내내 아주 유용하게 썼다. 한여름 한참 덥던 시기에도 에어컨의 설정 온도를 27도 정도로 맞춰 놓고 선풍기를 같이 트는 것으로 전기세도 많이 절약했고 푹푹 찌는 더위가 물러가 에어컨을 더 이상 켤 필요가 없게 된 후로는 한낮의 간헐적인 더위를 식히거나 머리를 감고 나서 머리칼을 말리는 등 조금씩이나마 꾸준하게 썼다. 4만 원 채 안 하는 가격을 생각해 봤을 때 올 한 해를 쓴 것만으로도 이 녀석은 충분히 제 몸값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오늘쯤에는 이 녀석을 싸서 집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날씨가 이렇게 서늘해졌는데 아직도 선풍기를 안 집어넣었느냐고 놀랄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가 있었다면 그는 최소한 2주쯤 전에는 이 일을 해치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나 저제나, 엄두가 나지 않는 것 반 귀찮은 것 반 해서 요즘은 하루에 한 번도 켜지 않는 이 선풍기를 계속 놓아두고 있었다.


늦은 가을에서 봄까지, 우리 집에서 선풍기를 넣어두는 자리는 창고의 위쪽 부분이다. 거기에 선풍기를 쑤셔 넣기 위해서는 일단 머리와 날개 부분을 분리해 따로 싸야 하고, 아마 내 키로는 의자라도 하나 밟고 올라가 한참을 낑낑대며 조심스럽게 잘 쑤셔 넣어야 할 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풍기를 분리해서 싸 넣기 전에는 여름 내내 쌓인 날개며 머리 부분 철망의 먼지를 닦는 일도 해야 한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도 없고 귀찮기도 하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 하지, 모레 하지 하는 식으로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침대 정리를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미루다가는 선풍기와 나란히 앉아 첫눈을 볼 수도 있겠다고.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물론 그런 일련의 과정들이 못 견디게 귀찮고 안 내키면 클릭질 몇 번이면 살 수 있는 예쁜 선풍기 커버를 사다가 씌워놓고 방구석 걸리적거리지 않는 자리에 방치해 두는 방법도 있을 것이긴 하다. 그러나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다른 이유는 없다. 그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집에는 나를 위해서 그 모든 귀찮고 번거로운 모든 일들을 알아서 해주던 그런 사람 같은 건 없다. 그게 뭐든 이젠 내가 내 손으로 직접 해야만 한다. 내가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남겨진 자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내가 매일매일 뼈저리게 깨닫고 있듯이.


까짓것, 하면 또 하지. 일부러 그렇게 중얼거려 본다. 오빠는 나 편하라고 10년 넘게 하던 건데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지. 사실 그러라고 도망간 거잖아. 오빠만 믿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그거 얄미워서 너 어디 식겁 좀 해보라고 도망간 거잖아. 그런 거면 내가 해야지 어떡해. 이런 독백을, 생각보다 조금은 무덤덤하게 내뱉을 수 있었다.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날카로운 뭔가로 찌르는 듯이 아프지만.


이렇게 훌쩍 가버릴 거면 날 그렇게 곱게 키우지 말지 그랬어. 그런 하나마나한 말을, 그의 사진을 향해 중얼거려 본다. 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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