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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07. 2022

반창고는 있나요

-178

이번 주 들어 3일이나 30분 늦게 잠에서 깼다. 포근한 이불에 둘둘 감긴 채 일어나기 싫어지는 것은 기온이 내려가고 있다는 내 나름의 시그널이긴 해서, 아 이런 식으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려나보다 하는 생각을 매일 아침마다 하고 있다. 어제는 무사히 선풍기를 싸 넣는 데 성공했으니 이제 조만간 바통터치라도 하듯 가습기가 등장할 차례일 것이다. 인간의 일상이란 참 이렇게나 번잡하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된다.


가습기는 몇 년 전 가을에, 내가 불쑥 '질렀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 속의 점막이 잔뜩 말라 찢어질 듯이 아프고 가끔은 피가 올라오기까지 하기에 이거 도대체 왜 이런가 싶어 인터넷을 뒤져 보았더니 집안 공기가 너무 건조해서 그렇다고, 가습기 한 대 들여놓으면 몰라보게 좋아진다는 간증 글들이 여기저기 올라와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온갖 쇼핑몰과 블로그의 사용후기들을 일일이 뒤져가며 적당한 가격에 적당한 성능에 적당히 세척하기 좋은 가습기 한 대를 샀다. 그리고 상당히 답지 않게도, 매일 아침에 일어나 남아있는 물을 버리고 매일매일 가습기를 씻어서 관리하는 일을 내가 맡아서 했다. 내가 들인 물건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온이 선선해지고 날이 건조해지기 시작하면 그는 발을 잘 절었다. 뒤꿈치가 잘 갈라지기 때문이었다. 어딘가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여서 붙잡아 앉히고 발바닥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뒤꿈치의 살이 푹 파이다시피 갈라져 심지어는 피가 맺혀 있을 때도 있었다. 가습기를 사고 나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다지만 그는 매년 가을 겨울마다 심심하면 갈라지는 뒤꿈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때마다 나는 생살이 이렇게 터져서 피가 나는데 왜 말을 안 하느냐고, 상당히 드물게 그를 '야단'치며 갈라진 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여주곤 했다. 그 반창고는 내가 몇 년의 '임상실험' 끝에, 두껍지 않고 얇으면서도 굴곡진 발의 모양에 잘 들러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찾아낸 물건이었다. 별다른 처치를 하지 않아도 그렇게 상처 난 부위에 반창고 하나를 붙여 놓는 것만으로도 이상할 만큼 아프지 않아진다며 그는 늘 신기해하곤 했었다.


어제는 문득 손등이 건조하다는 기분에 몇 달 만에 핸드크림을 꺼내 발랐다. 핸드크림을 바르면서 내 생각은 몇 단계를 건너 뛰어가 이맘때가 되면 슬슬 갈라지기 시작하던 그의 뒤꿈치에 가 닿았다. 날이 차지는데 거기선 괜찮으려나. 거기선 뒤꿈치가 갈라져 피가 난다고 누가 반창고를 붙여주진 않을 텐데. 워낙에 제 몸 아픈 것에는 미련하던 사람이라 아파도 아프다는 말도 안 할 테고 뒤꿈치 살이 터진 것 같은데 좀 봐 달라는 말 같은 걸 하는 널푼수도 없을 텐데. 상담사 선생님의 말씀에 의하면 사람이 천국에 갈 때는 육신의 모든 흠결을 벗어놓고 간다니 그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새 달이 바뀌었고, 내일은 봉안당에 가는 날이다. 반창고라도 한 통 넣어주고 올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혹시 그게 없어서 애를 먹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늘 그의 상처 난 뒤꿈치에 붙여주던 꼭 그 제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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