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당신에게

농도 50%

-180

by 문득

어영부영, 그 없이 보낸 시간이 날자로는 180일을 넘겼고 대충 달수로도 반년을 넘겼다. 막 뭔가를 잘하고 있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답지 않게 퍽 용을 쓰고 있다고는 늘 생각했다. 험한 생각까지야 원래의 내 성격상 어지간해서는 쉽지 않다고는 해도, 와르르 무너져서 내 일상 자체를 놓아버리고 숨만 겨우 붙은 채로 살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래도 뭐든 해보려고 발버둥을 열심히 치고 있다는 점에서. 이만하면 우수상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감투상 정도는 줄 수 있지 않나 하는 것이 지난 반년에 대한 내 소회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9834일이라는 그의 곁에서 보낸 시간에 비해 내가 혼자 보낸 180여 일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고 보잘것없어서 가끔 가슴이 턱 막힐 때가 있다.


내가 그의 곁에서 보낸 시간은 27년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겨우 반년을 지나왔다. 그러니까, 지난 4월 8일부터 오늘까지의 이 쓰라린 시간을 얼추 53번 정도를 더 반복해야 그와 함께 보낸 시간과 내가 혼자 보낸 시간은 1 대 1로 평형비가 맞게 되는 셈이다. 53번이라니. 그건 너무나 길고 먼, 내게는 마치 우주의 멸망만큼이나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그 길고 오랜 시간을, 과연 나는 무사히 잘 보낼 수 있을까.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에게 미역이 좋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건 미역에 들어있는 요오드 성분이 방사능 물질을 희석시켜 몸에 흡수되는 것을 막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요즘 나의 삶은 어쩌면 그와 비슷하게, 그와 함께 보내던 시간을 희석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물타기를 하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편의점이나 햄버거 가게에서 하는 1+1 행사가 이젠 더 이상 내겐 의미가 없다는 류의 글을 쓴 기억이 나는데 요즘 나는 그런 행사가 있으면 일단 사다 놓고 내가 두 번을 먹고 있다. 처음엔 그지없이 씁쓸하고 가슴이 아팠지만 이젠 그런 죄책감도 가슴 아픔도 많이 엷어졌다. 그러면서 실감한다. 앞으로 남은 내 삶은 그냥, 이런 식의 끊임없는 물타기겠구나 하고. 그와 함께 하던 모든 것들. 그가 해주던 모든 것들.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에 대한.


그러나 한 가지 씁쓸한 것은, 내가 그렇게 27년을 무사히 살아낸다고 해도 희석할 수 있는 농도는 고작해야 50% 일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떤 용액의 농도가 50%라면 그건 농담으로라도 '엷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떡해도 나는 최소한 50%의 그를 내 안에 가지고 살 수밖에 없다는 뜻이 된다고 해석해도 될까. 그 사실은 이왕 그런 거라면 애써봐야 소용없겠구나 하는 체념이기도 하고 이왕 거라면 빨리 뭔가를 정리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조금 뒤틀린 의미의 안도이기도 하다.


27년의 시간을 다 보내면 내 나이도 일흔이 넘겠지. 그의 기억이 농도가 50% 아래로 내려가는 그때쯤이 되면 나도 조금은 담담해질까. 오늘은 문득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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