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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14. 2022

아무리 빨리 해도 결국 늦는 것 2

-185

요즘 들어 뭔가를 먹으려고 입을 벌릴 때 턱 쪽에 딱딱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입을 여는 일이 너무 없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가 떠난 후로 말 한마디 할 필요가 없는 날이 늘고 있다. 하루에 한두 통 정도는 전화통화라도 하지만 가끔 그나마도 없는 날은 입을 다물고 있자고 들면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그럴 때의 나는 책상 위에 놓인 그의 사진 액자를 향해 이런저런 말을 거는 것으로 소통 욕구를 채운다. 이불 새로 꺼낸 지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됐는데 조금 더 두꺼운 이불을 꺼내야 하게 생겼다는 둥, 텔레비전이 기어이 고장 났다는 둥, 연예인 누구랑 누구가 사귄다는 둥, 유명한 사람 누군가가 사망했다는 둥 하는, 그가 있었더라면 분명 그와 함께 나누었을 이야기들을 나 혼자 떠들고 그의 대답을 상상하고 또 그에 대한 대꾸를 한다. 입을 꾹 다물고 내 속에 침잠해 있는 것보다는 이 편이 낫지 않냐는 내 멋대로의 생각에서다.


어제의 토픽은 단연 고장 나 버린 텔레비전이었다. 주문해놓은 텔레비전은 무사히 와서 자리를 잡았지만 고장 난 예전 텔레비전은 수거가 되지 않아 내가 직접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고 집 앞에 내놓아야 했다. 무료 가전 수가는 일정상 열흘이나 후에나 가능했고, 나는 이젠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그 텔레비전을 한시도 더 집안에 놓아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그 그 낡아빠진 PDP TV는 무거워도 너무 무거웠다. 실제로는 아니겠지만 체감상으로는 내 몸무게만큼이나 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집어넣고 힘을 줄만한 곳도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드는 대신 밀고 가면 좀 쉬우려나 생각했지만 받침대 부분에 붙은 논슬립 때문에 아무리 밀어도 1센티도 밀리지 않았고 옆으로 세워서 밀려니 바닥이 다 긁힐 판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제야 나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 무거운 것을 수리점까지 들고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어서' 그냥 새로 사기로 했다는 글들이 왜 그렇게 많았던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순간 벽이라도 막힌 듯 잠시 막막해졌다. 내게는 이 텔레비전을 번쩍 들어 집 앞에 내다 놓을 만한 근력이 없었고, 도움을 청할 만한 사람도 주변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건 내 사정이었다. 내 앞에 주어진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치우던지, 아니면 열흘 후까지 집안 어딘가에 방치하던지.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목장갑을 꼈다. 현관문을 미리 활짝 열어둔 후 텔레비전의 아랫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있는 힘을 다 짜내 일단 세로로 세웠다. 그리고 무슨 왈츠라도 추듯이, 바닥에 닿은 두 모서리를 번갈아 빙빙 돌려 바닥을 찍어가며 한 발씩 텔레비전을 집 밖으로 옮겼다. 열어놓은 현관문을 닫을 뒷손 같은 건 없어서, 그냥 열어둔 채로 엘리베이터까지 갔다. 열린 문이 닫히려다가 다시 열리기를 두어 번 반복하는 동안에는 식은땀이 났다. 그렇게 한참 동안 사투를 벌인 끝에, 나는 간신히 텔레비전을 질질 끌듯 집 앞에 내다 놓을 수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풀썩 주저앉으니 너무 용을 쓴 나머지 팔이 다 벌벌 떨렸다. 텔레비전 진짜 겁나게 무겁다. 오빠 말마따나 돈 조금 더 쓰고 조금 더 좋은 거 샀으면 저렇게까지 무겁진 않았을 텐데. 나는 그렇게, 이틀에 걸친 '텔레비전의 난'이 무사히 진압되었다는 보고를 하며 그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있었더라면 내가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냥 내가, 참으로 온갖 것을 다 그에게 시키고 참 편하게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뿐이다. 이런 걸 너무 늦게 깨달아서 미안하다는 생각도 함께. 물론 그래 봤자 이미 때늦은 후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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