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Oct 13. 2022

원래 그런 것

-184

그가 떠나간 후로 실시간 방송을 보지 못하고 지나간 프로그램들의 vod속에서만 살고 있다는 말은 이미 몇 번이나 한 적이 있다. 이미 다 본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보고, 그래서 몇몇 부분의 대사며 자막을 외워버리기까지 한 지점에서 그 vod들은 '프로그램'으로서의 효력을 상실했다고나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일하거나 공부할 때 틀어놓는 방해되지 않는 잔잔한 음악이나 백색 소음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다고나 해야 할지.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당연한 건 하나도 없는 법인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설거지를 마치고 잠깐 숨을 돌리려는데 어딘가에서 찌직, 찌직 하는 불쾌한 소음이 몇 번 간헐적으로 들렸다. 갑자기 추워진 쌀쌀해진 날씨에 집안 여기저기 붙어있는 양면테이프의 접착력이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고 넘기기에는 그 소리는 어딘가 불길했고, 매우 신경이 거슬리는 파장을 내고 있었다.


잠시 다른 일을 하다가 텔레비전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텔레비전 화면에 마치 누군가가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시커먼 스크래치가 군데군데 나 있었다. 그건 비가 오거나 태풍이 치는 날 신호가 미약해 화면이 깨지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증상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vod를 멈추고 텔레비전을 껐다가 다시 켰다. 그러나 이젠 숫제 화면 자체가 켜지지 않았다.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몇 번을 껐다가 켜도, 코드를 뽑았다 다시 꽂아도, 혹시나 셋탑박스 문제인가 해서 연결선을 모조리 뽑았다가 다시 꽂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수명이 다 됐구나.


우리 집의 텔레비전은 자그마치 12년이나 된, 요즘은 나오지도 않는 PDP TV다. 당시에 우리는 이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이 텔레비전을 장만했다. 이사를 하는 데는 생각보다 돈 드는 곳이 많았고, 그래서 지출에 잔뜩 예민해져 있던 나의 고집으로 산 텔레비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그때 네 말을 듣지 말고 이왕 사는 거 조금 더 큰 것으로, PDP 말고 LCD로 샀었어야 했다고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다음에 살 때는 괜히 돈 아끼지 말고 오빠 말대로 좀 더 크고 좋은 걸로 사자고 반쯤은 달래듯이 대꾸했다. 그리고 텔레비전을 바꾸는 데 드는 그 모든 숙려와 계산은 이제 온전히 나 혼자만의 몫이 되었다.


요즘 아무리 텔레비전이 많이 싸졌다고는 해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지출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가격들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공식 서비스 센터의 가장 빠른 일정은 24일 오전이었다. 그건 내가 너무 힘들어서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설 수리점 몇 군데에 전화를 해 문의를 했다. 그러나 그 문의는 내가 텔레비전의 모델명을 불러주는 순간 끝났다. 수리 안 돼요. 단종돼서 부속도 안 나오고요. 어찌어찌 수리한다 쳐도 새로 사는 값만큼 나올 건데 그냥 새로 사세요. PDP 무겁고 전기도 많이 먹잖아요. 그게 그분들의 답변이었다. 실제로 인터넷을 잠깐 찾아보니 PDP TV가 고장 났는데 수리하려니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울며 겨자 먹기로 새것을 샀다는 글들이 최근도 아닌 5, 6년 전 날짜로 많이도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나부터가 이미 수긍하고 있었다. 이미 쓸 만큼 썼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임시방편으로 집 근처의 재활용 매장에 가서 현금가 17만원에 중고 텔레비전 한 대를 주문했다. 모르긴 해도 수리하는 것보다는 이 편이 시간도 적게 걸리고 가격도 쌀 것 같았고, 이 텔레비전이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열심히 손품을 팔아서 오래 두고 쓸 녀석을 한 대 들이는 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일 것 같아서였다.


불과 어제 나는 이 브런치에 남들은 백 살까지 산다는 이 시절에 그는 왜 그렇게 젊은 나이에 갑작스레 떠나야 했는지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해서 괴롭다는 글을 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불과 하루 만에, 이런 식으로 왔다. 살아있지도 않은 텔레비전을 통해서. 마치 그가,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 대신 텔레비전을 빌려 말하기라도 하듯이. 이별은 원래 그렇게, 갑작스럽게 오는 것이라고. 미리 예고를 다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주는 이별은 그리 흔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그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이쯤 되면 우리 집 어딘가에서 내가 사는 꼴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어쩌면 그래서 꿈에조차 한 번 다녀가지 않는 건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