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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19. 2022

롤리폴리

-189

내 하루 일과는 번잡했다가 조용해졌다가를 세 번쯤 반복하면 대충 끝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남짓, 이런저런 정리를 하고 간단한 아침 운동을 한 후 브런치에 글을 쓰기까지 바쁘고, 그러고 나면 자리에 앉아 조용하게 그날 할 일을 한다. 11시쯤이 되면 점심 준비를 하기 시작해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휴지통을 비운다든가 빨래를 한다든가 하느라 잠깐 번잡해진다. 그래 놓고 나서 잠깐 한숨을 돌린 후 오후 일과를 한다. 그리고 자리에 눕기 전에 잠시 간단한 운동을 하고 커피 따위를 마시느라 쓴 컵 등등을 치운다. 이런 매우 단조로운 루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 자기 전 정리에 손이 많이 가는 날이 있다. 오후쯤 출출함을 이기지 못하고 뭔가를 집어먹은 흔적이 남은 날이라든지, 보리차를 끓여놓아 식은 물을 물병에 옮겨 담아야 하는 날이라든지가 그렇다. 가끔 컵 정도나 씻어놓으러 주방으로 나왔다가 잔뜩 밀려있는 그런 일거리들을 보고 버럭 짜증이 치미는 날도 없진 않다. 그러나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이젠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니까.


어제도 그런 날의 하루였다.


가뜩이나 어제는 흔치 않던 외출을 하던 날이어서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내내 정신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이제 컵이나 씻어놓고 좀 편하게 쉴까 하고 나가본 주방에 치워야 할 것들이 이것저것 널려 있어 순간 울컥 짜증이 났다. 그 치울 거리들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도. 모른 척하고 그냥 자버릴까.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이런 일은 처음 한 번이 무섭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참 어떻게든 저 편한 대로 하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는 존재여서 이렇게 한 번쯤 슬쩍 밀려도 별 탈이 없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지금의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에고. 치우자. 치우고 자자. 일단 입을 열어 그렇게 말해 본다. 그것만으로도 조금 나 스스로를 다독이는 효과가 있기에.


그때였다. 노래를 들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은.


그가 떠나고 난 후 나는 한동안 음악을 듣지 못했다. 한동안 책상 한 구석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얼추 여름쯤이나 되어서였다. 특별한 금제 같은 것이 걸려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럴 의욕이 나지 않았다. 요즘은 어딘가로 외출할 땐 꼭꼭 이어폰을 챙겨 다니며 음악을 듣곤 하니 딱히 새삼스러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집에서 pc 스피커로, 외부로 울려 나오는 음악을 듣는 것은 그것과는 조금 다른 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유튜브를 켜고, 중독성 있는 걸로 유명한 한 걸그룹의 지나간 히트곡이 1시간 동안 반복되는 클립을 찾아 틀었다. 익히 아는 멜로디, 익히 아는 박자였다. 쿵쿵 울리는 비트를 따라 가사를 흥얼거리며, 나는 구질구질하게 쌓인 일거리들을 하나하나 해치웠다. 가끔 어깨를 들썩거리기도 했던 것 같다. 저걸 언제 다 치우나 싶던 일거리들은 우습게도 4분 남짓한 노래가 세 번을 돌기 전에 전부 끝났다. 그렇게 잘 준비를 마치고 돌아온 책상에서는, 언제나처럼 그의 사진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스산해졌다. 그러나 어제는 울지 않고, 잘 넘어갔다. 괜찮지는 않았지만,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어쨌든 살아가야 하니까. 그도 아마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까짓 스피커로 음악 한 번 들은 게 뭐가 대수냐고, 그렇게들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가 없는 모든 것들이 다 처음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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