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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20. 2022

이별에도 등급이 있다면

-190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지고 난 후 세상의 모든 이별 노래가 내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본 이야기일 것이다. 나 또한 비슷한데, 경우는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이별 노래는 '이별'을 상정하고 만들어진다. 그래서 대부분의 노래 가사 속에는 떠나간 그 혹은 그녀는 이미 나를 잊고 행복한 것 같은데 나는 그러지 못해서 힘들다는 탄식과 서글픔이 배어있다. 마치 듣는 나에게 이거 네 이야기 아니니까 과몰입은 자제하라고 밀쳐내기라도 하듯이.


그래서 그런 노래들을 들을 때면 가끔 생각하게 된다. 그냥, 우리가 단순히 헤어진 거라면 지금보다 덜 힘들까 하고.


그와 나는 더 이상 청춘은 아니었다. 미친 듯이 사랑하다가 헤어지는 청춘의 연애에 갖다 댈 수는 없을 것이고, 역시 살 맞대고 살만큼 산 부부의 결별에 비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결혼한 부부 두 쌍 중에 한 쌍은 이혼한다는 세상이다. 이혼한 그들도 한때는 열렬히 사랑해서,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 사람 정도면 이 풍진 세상 함께 늙어갈 만하다는 판단 하에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측은 결국 끝까지 들어맞지는 않았던 셈이다. 그와 나라고 그 확률의 올가미를 100% 피해 갈 수 있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우리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 취약했을 것이다. 그와 나는 법적인 부부도 아니었고, 우리 사이에는 그 모든 쓰고 떫고 아린 것들을 다 참고 넘기게 해 준다는 자식도 없었으니까. 흔히 부부를 등 돌리면 남인 사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야말로 등 돌리면 남인 관계였다. 나란히 이름이 올라 있는 호적등본 하나 뗄 수 없었던 우리의 연약한 관계는 사실 그만큼이나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관계였다. 그러니 그만큼 순식간에 깨지기도 쉬웠을 것이다. 결국 끝은 다른 형태로 오긴 했지만.


만일 우리의 끝이 그런 식이었다면 지금의 나는 좀 다르게 살고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그에게, 혹은 나에게 이 사람을 놓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 같은 다른 이성이 생긴다든가, 혹은 그간 억지로 참고 살던 서로의 단점에 대한 인내심이 바닥났다든가, 아니면 차마 이유조차 찾을 수 없는 자잘하고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한다든가 하는 등등의 일로 돌아서 남이 되었다면.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이 다른 형태로 남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지금보다 덜 슬플 것 같기도 하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공유한 우리가 갈라서 남이 되는 데는 아마 상당한 진통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그는 나에게 나는 그에게 꽤나 많은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남겨진 나는 아마 그와의 좋았던 기억보다는 그 마지막 순간의 상처들을 보듬고 끌어안느라 그를 그리워할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었을 테다.


그러나 어떻게 생각하면 더 힘들 것 같기도 하다.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공유한 사람이 이제는 나와는 상관없는 타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과연 얼마나 담담할 수 있을까. 그는 지난 4월의 어느 날 내 곁에서 떠나감으로써 영원히 나만의 사람으로 남았다. 나는 그를 빼앗기거나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먼저 보낸 것이니까. 우리의 이별에는 그 누구의 책임도 잘못도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가끔은 그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프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렇다. 나는 그를 원망하거나 미워할 수 없고 그럴 필요조차도 없다. 그는 내가 싫어져서,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내게서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이다.


유난히 아침 공기가 싸늘한 오늘 아침에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사람이 아니어도 좋으니, 이 너른 세상 어느 한 구석에 당신이 살아 숨 쉬고 있기만 해도 나는 참 행복하겠다고. 그러나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한다. 27년이나 쌓인 세월의 무게마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내가 싫어지고 지겨워져서 나를 떠나간 거라면 나는 과연 그 사실을 버텨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세상의 모든 이별은 다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슬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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