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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27. 2022

심심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건지

-197

내가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방 창문에는 커튼 대신 암막 블라인드가 달려있다.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창문에 커튼을 달 건지 블라인드를 달 건지를 놓고 몇 날 며칠을 그와 핏대 세우는 토론을 한 끝에 결정한 항목이다. 해가 긴 여름에는 안 그랬지만 이번 달 들어 부쩍 해가 짧아지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대충 오후 여섯 시쯤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어제는 그 루틴이 조금 틀어져, 늘 쓰던 펜글씨를 한 장 쓰고 나서야 아, 블라인드 안 내렸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별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인드 줄을 당기는 순간, 와당탕 소리를 내며 블라인드가 아래로 떨어졌다. 설치한 지 10년이 넘었고 그 와중에 매일매일 줄을 당겨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보니 양 옆의 고정하는 부분이 헐거워져 통째로 빠진 것이다. 이 블라인드는 창 하나를 통째로 커버하는 정도의 길이여서 간편하게 한 자리에 서서 양 옆을 톡톡 끼우는 것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있을 때는 한쪽을 먼저 끼우고, 그 끼운 쪽을 내가 붙들고 있는 사이에 그가 다른 한쪽을 끼워 사태를 수습했었다. 그러나 이젠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식탁 의자를 세 개쯤 들고 와 옆으로 주루룩 놓고는 블라인드의 한쪽을 먼저 끼우고 그 끼운 쪽이 빠지지 않게 붙든 채로 게걸음으로 옆으로 걸어가며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길이가 대충 내 키만 한 블라인드를 그런 식으로 핸들링하는 건 역시나 힘에 부쳤다. 끼워야 하는 부분이 잘 맞지 않아 씨름하는 동안 저 쪽 편이 빠져서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기를 한 서너 번쯤 반복한 끝에 나는 가까스로 혼자 힘으로 블라인드를 원래대로 끼워놓을 수가 있었다. 별로 무겁지는 않았지만 용을 너무 쓴 덕분에 팔이 벌벌 떨려서, 어제의 펜글씨는 글씨 연습을 시작한 이래 가장 엉망으로 써재끼고 말았다.


아침엔 또 컴퓨터 모니터가 말썽이다. 생전 그런 일이 없더니 아침에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으면 모니터가 한 방에 켜지지 않고, 불길하게 두어 번 깜빡거리다가 전원을 몇 번이나 껐다 켜면 그제야 멀쩡해진다. 일단 디스플레이 드라이버 업데이트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업데이트를 해 보았지만 과연 이 정도로 해결이 나는 것일지 의심스럽다. 산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왜 벌써 이모양이람, 하고 투덜거려 본다. 며칠 전엔 생각지도 못하던 텔레비전 때문에 목돈이 나갔는데 모니터까지 말썽이라니 이거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니냐고도.


그가 떠나고 너무 소슬하고 조용할 것이, 혹은 너무 심심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건지 내 일상은 크고 작은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생길 때마다 이젠 어떡하지, 하고 물어볼 사람 하나 없이 나 혼자서 오롯이 모든 걸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 내 키에는 버거운 천장 형광등이 나가도, 어느 날 갑자기 텔레비전이 켜지지 않아도, 블라인드가 떨어져 내려도, 컴퓨터 모니터가 깜박거려도 이젠 그냥 나 혼자서 다 알아서 해야 한다는 사실이. 물론 어쩌면 그건, 그에게 그 모든 일을 떠밀고 한 발 뒤로 물러나 손가락 물고 어떡하지 어떡하지만 연발하고 있으면 알아서 모든 일이 해결되었던 그 숱한 날들에 대한 뒤늦은 업보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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