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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Oct 28. 2022

삐삐가 있다면

-198

그가 떠난 후 반년 넘게 상담을 하면서 내가 찾으려고 하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내가 그의 부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막말로 그를 잊어버려야 하는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한 때는 재미있게 보았지만 이제는 끝나버린 드라마처럼 기억 한 편에 접어놓아야 하는 건지. 그리고 내게 그런 게 과연 가능하긴 한지에 대한 대답이다. 우리가 1년은 열두 달이고 하루는 24시간이라는 당연한 전제 하에 살고 있는 것처럼 그의 존재는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상수였고 그런 존재가 사라져 버린 지금 내 인생은 근저부터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아니, 어쩌면 이 말조차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내가 그를 잊어버리는 것 따위가 가능할 리가 없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그의 부재와 그 이후의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테다. 그게 쉽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이겠지만.


어제는 인터넷을 서핑하다가 '사람은 목소리부터 잊혀진다'는 문장을 발견하고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쓴 바, 그는 잘생기고 훤칠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목소리 하나만큼은 꽤 잘생긴 사람이었다. 일 때문에 외출해 비좁아 터진 지하철과 만만치 않은 상대방과 가끔은 덥고 가끔은 추운 날씨에 시달리며 일을 보고 난 후 용건 다 끝났고 이제 집에 갈 텐데 들어가는 길에 뭐 사 갈 것은 없느냐는 말을 하러 전화를 했을 때 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하루 종일 고생했던 마음의 앙금이 싹 씻겨나가는 그 순간을, 나는 미처 말해주지 못했지만 꽤 좋아했었다. 그를 잊게 된다면 목소리부터 잊게 된다니,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의 얼굴은 그가 떠나고 난 후로도 초상화든 사진이든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 집 이곳저곳에 남겨져 있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어느 곳에도 남아 있지 않으니까. 사진은 뒤늦게 발견될 수라도 있지만 목소리는 좀 달라서 미처 찾지 못한 보물처럼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가 갑자기 짜잔 하고 나타나는 일 같은 건 없을 테니까. 지금이야 생생하지만, 허공을 향해 혼잣말을 해놓고 그가 그 말에 대해 어떤 목소리와 어떤 말투로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까지 혼자 알아서 상상할 수 있지만 10년 후 20년 후까지도 그럴까. 이쯤에서 나는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대학교 다니던 무렵 쓰던 삐삐가 지금까지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럼 거기 녹음된 그의 목소리는, 정기적으로 보관만 계속 눌러주면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았을 텐데. 그래서 마음이 허한 날 한 번씩 꺼내 들어보며 대부분은 울고, 가끔은 웃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한때 현대인의 필수품 정도로 여겨지던 삐삐는 내가 대학교에 다니던 그 몇 년을 반짝 유행하고는 참 빨리도 사라져 자취를 감추고 말았었다. 지나간 것들이란, 추억이란 원래 그렇게 다 돌아보면 허망할 뿐일까.


또 모르는 일이다. 세상은 날로 좋아지고 있으니, 키워드 몇 개만 집어넣으면 사람보다 더 뛰어난 그림을 그려준다는 AI도 있는 모양이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의 목소리를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 같은 게 조만간 개발될지도. 그런 식으로라도 그가 내게서 지워지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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