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Oct 31. 2022

네 돈으로 맛있는 것 사 먹어

-201

내 컴퓨터는 거의 하루 24시간 내내 켜져 있다. 가끔 하루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통계 결과 같은 것이 발표될 때가 있는데 내 경우엔 크게 의미가 없다. 내 생활은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것이 일종의 디폴트 값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앉아서 하는 일이 뭔가 생산적인 일인가, 그렇지 않은 일인가 정도의 구분이 조금 있을 뿐이다.


컴퓨터 모니터의 파업은 그래도 얼마 전 느닷없이 일어난 텔레비전의 파업에 비해서는 꽤 신사적인 편이었다. 그래도 이 녀석은 며칠 전부터 전원이 한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든가 화면의 중간 부분에 시커멓게 명도가 죽은 부분이 생긴다든가 하는 식으로 지금 내 상태가 미령하니 네가 알아서 수습을 준비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물론 나는 이번 달 들어 텔레비전에만 목돈이 들어간 것으로도 모자라 모니터까지 바꿔야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부정하려고 그래픽 드라이버를 새로 설치한다든가 HDMI 케이블을 바꾼다든가 하는 뻘짓을 하며 애써 그게 그런 게 아닐 거라고 외면해 왔지만. 그렇게 한 며칠간 말미를 주던 모니터는 기어이 지난 토요일 아침 다시는 켜지지 않았다. 전원을 몇 번이나 누르면 그제야 아주 잠깐 반짝 켜졌다가 다시 맥없이 꺼져버리기를 반복했다. 맥이 탁 풀렸다.


컴퓨터를 쓴 짬밥이 몇 년인데, 사실 대충 봐도 이게 무슨 문제이고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는 짐작이 갔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 싶어 그의 봉안당에도 다녀와야 하는 그 정신없는 와중에 나는 몇 군데에 카톡을 보내 견적을 요청했다. 약간의 디테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오는 답들은 비슷했다. 백라이트 문제, 혹은 메인보드 문제. 어느 편이든 시간이 3, 4일 이상 걸리는 것은 피할 수 없고 수리비 또한 싸게 줘도 10만 원 남짓이었다. 내 모니터는 2016년도 제조 제품으로 그만하면 제 수명을 한참 넘겨 쓰셨으니 이참에 하나 바꾸시라는, 텔레비전 때와 똑같은 말들이 돌아왔다.


어쨌거나,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구경이나 해 보자 싶어 봉안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집 근처에 있는 대형 마트에 들렀다. 내가 쓰던 27인치 모니터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싸지도 않았지만 또 그렇게까지 비싸지도 않은 애매한 가격대에 포진해 있었다. 텔레비전의 경우는 신제품이 너무 종류도 다양한 데다 덥석 지출하기엔 생각보다 금액대가 높아서 중고를 산다는 것 외에는 내가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모니터의 경우는 조금 더 사정이 복잡했다. 당근마켓을 켜서 내가 쓸만한 사양의 모니터들을 검색해 보니 대개 12만 원 정도에 가격대가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마트에 가서 본 세 제품들은 그것의 딱 두 배인 24, 5만 원 정도를 주면 지금 당장 사서 집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텔레비전의 경우는 중고를 사다 놓고 시간을 버는 것만으로 중고에 들인 돈의 본전을 뽑을 수 있겠지만 모니터의 경우도 그럴까. 결국 두 번 지출하게 되는 셈이 아닐까. 결국 나는 처음 매장 안을 휙 둘러보았을 때부터도 눈에 들어왔던 적당한 가격의 새 모니터 하나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사이 디스플레이 가전에 생각지도 못한 돈을 쓰고 나니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아 좀, 이런 일들은 텀 좀 두고 일어나면 안 되는 걸까. 왜 이렇게 한꺼번에 못 몰아닥쳐서 안달일까. 먼지투성이의 책상 뒤편으로 기어들어가 케이블을 뽑고 모니터를 들어내면서 나는 계속 투덜거렸다. 그래도 그 돈 주고 이쁜 거 잘 사 왔네. 제조사도 대기업이고. 그만하면 득템했다야. 그라면 아마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거 문득 때늦은 그의 생일선물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본인이 그렇게나 20년 넘게, 애면글면 챙겨주던 내 생일날에 편의점 미역국과 냉동 치즈케이크 한 조각으로 대충 때우고 넘어가는 내가 신경이 쓰여서, 그래도 네 생일인데 이런 거라도 너를 위해 사리고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아, 그런 거냐고 한참이나 웃었다. 뭐가 이래. 선물은 오빠가 오빠 돈으로 사서 날 줘야 그게 선물이지. 네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으라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 것으로 생각지도 않은 돈을 수십만 원이나 지출했다는 사실에 언짢았던 기분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려나, 이제 또 몇 년간 최소한 컴퓨터의 모니터가 사람의 뒷목을 잡게 하는 일은 없을 테지. 그리고 이 모니터도 수명이 다할 그때쯤에는 나도 조금은 덤덤해져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은 그렇게나 가까이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