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당신에게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득 Nov 03. 2022

남는 건 추억뿐이다

-204

그러니까 그게 벌써 작년 6월의 일이다. 나는 소셜커머스를 뒤지다가 집 근처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 호텔의 호캉스 패키지가 싼 가격에 나온 것을 발견했다. 1박 2일에 조식 뷔페, 호텔 근처의 아쿠아리움 관람권까지 덤으로 붙어있는 상품이었다. 휴가철 직전의 비수기였던지라 그 가격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심각해지곤 하는 나는 그 패키지 페이지를 몇 날 며칠을 쏘아보며 고민하다가 말 그대로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가 보겠느냐'는 객기 아닌 객기로 그 패키지를 결제했다. 그리고 그 며칠의 고민이 무색할 만큼 잘 놀고 왔다. 그날 찍은 사진들과 동영상들은 아직도 내 폰 속에 소중하게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와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그는 여행을 좋아했다. 그의 꿈은 스스로 배를 몰고 먼바다로 나가보는 것이었다. 아주 예전 세상의 무서움을 모르고 함부로 창업이라는 걸 했다가 날이면 날마다 온갖 걱정과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했던 그 무렵에도, 그는 조금만 돈이 융통되면 주말을 틈타 어디로든 바람을 쐬러 가자고 했었다. 거창하게 돈을 들여서 뭔가를 하자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기름값 정도나 들여서 강원도 안반데기에 가서 별을 보고 오자거나 안면도 바닷가에 가서 밤바다를 보고 오자거나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그 모든 게 귀찮았고, 번거로웠고,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당장 눈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이렇게 산적해 있는데 주말 잠깐 그런 식으로 도망쳤다 돌아오는 게 도대체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건지, 그때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같이 가자는 그의 말을 기어이 뿌리치고 혼자 집으로 돌아가 버린 적도 많았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지금에서야 그러지 말 걸 하는 후회를 한다. 고작 호텔에서 보낸 그 1박 2일의 호캉스도 지금 이렇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그때 그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녔더라면 그것들은 지금 다 얼마나 귀한 추억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에.


거의 날마다 전화를 해 안부를 물어주시는 지인이 요즘 생각지 못한 일이 연거푸 터져 돈이 말려 죽겠다면서, 그 와중에 내장산에 단풍 구경을 가는 패키지가 한 5만 원에 나온 것이 있기에 덜컥 돈을 냈는데 잘 한 건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니요, 잘하신 거 맞아요.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깟 5만 원 그거 안 쓰고 쟁여놓는다고 그걸로 뭘 할 수 있는데요. 사나흘 밥이나 사 먹으면 그걸로 끝이잖아요. 어차피 좀 있으면 단풍도 다 떨어지고 없을 건데요. 그냥 다 잊어버리고 가서 단풍 보고 오세요. 그렇지? 잘 한 가지? 그렇게 되묻는 목소리가 조금 밝아져서, 아주 잠깐이나마 흐뭇해졌다.


그러게. 그때 안반데기에, 안면도 밤바다에 갔다 오는 데 수백만 원 수천만 원이 들었을 리도 없는데 나는 그 몇 푼 안 되는 돈을 쟁여서 도대체 뭘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귀찮은 물건들을 침대 아래로 대충 밀어 넣듯 그런 머리 아픈 생각 따위 잠시만 접어두고 같이 떠났으면 지금 곱씹을 장면이 하나라도 더 남아있었을 텐데. 그런 뒤늦은 후회를 한다. 혹시나 눈에 밟히는 단풍 패키지가 있으시다면 며칠 남지 않은 이 가을이 끝나기 전에 얼른 다녀오시라는 권유의 말씀을 드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더욱 좋다. 지나고 나면 남는 건 결국 그런 순간들 뿐이기에.


매거진의 이전글 별 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