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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11. 2022

어느 빼빼로 데이에

-212

그와 함께 지낼 때에 비해 딱히 먹는 것도 없고 쓰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도 2주에 한 번씩은 어떻게든 마트에 주문을 하게 된다. 처음엔 최소 주문금액 4만 원을 채우는 것이 너무너무 힘들었지만 이젠 늘 사는 품목 몇 가지를 담고 이것저것을 몇 가지 더 담고 나면 순식간에 금액이 5만 원 6만 원에 육박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 기껏 담아놓은 물건 몇 가지를 슬그머니 빼는 지경에 다다랐다.


이번 주의 주문도 비슷했다. 특히나 이번 주는 쌀도 사야 했고 보리차도 조금 사야 해서, 그 두 가지만 담으니 벌써 2만 원을 넘겼다. 늘 사던 품목 몇 가지를 담고 적당하게 가격을 맞춰 주문을 하려다가, 혹시나 좀 싸게 파는 뭔가가 있나 싶어 이벤트 페이지를 기웃거리던 나는 화면 가득 펼쳐진 알록달록한 과자들의 사진 앞에서 잠깐 손을 멈추었다. 아, 이번 주에 빼빼로 데이가 있구나.


같이 한 세월이 27년이나 되었던 그와 나는 언제부턴가 발렌타인 데이 같은 기념일을 따로 챙기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둘 중 누구도 그런 것에 섭섭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날들을 영 쌩까고 넘어갔던 것은 아니고, 그 무렵 마트에 주문을 할 때 초콜릿이든 막대과자든 하나 같이 주문해서 그날이 되면 나누어먹는 정도의 성의 표시는 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따로 주문을 하지 못하면 집 앞 편의점에 가서 3천 원 남짓하는 단품이라도 하나 사서 나누어먹기도 했다. 그건 무슨 특별한 기념일이라기보다는 그 핑계를 대고 초콜릿이나 막대과자를 사 먹는 소소한 이벤트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정도로 충분했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가 떠난 후 처음으로 맞는 빼빼로 데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마트에 주문을 하면서 그 많고 많은 종류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몬드 발린 것으로 한 통을 주문했다. 그가 있을 때는 그가 한 종류를 고르고 내가 한 종류를 골라서 반씩 섞어서 나눠 먹었지만 이젠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한 통에 고작 천 원 남짓 하는 빼빼로 한 통을 사려면서, 나는 이래도 되는 건지 이게 맞는 건지를 한참이나 고민했다. 그러나 그냥 눈 딱 감고 한 통 사기로 했다. 원래라면 내일쯤, 달 바뀐 인사를 하러 봉안당에 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냥 오늘 다녀오려고 한다. 빼빼로 데이니까. 봉안당의 규정상 빼빼로를 갖다 넣어줄 수는 없겠지만 그 핑계로 얼굴이라도 보고 오려고 한다. 당신이 그렇게 먼저 떠났는데도 나는 뻔뻔스럽게 살아남아서 나 혼자 처먹으려고 빼빼로도 샀다는 말을 하고, 좀 웃던지 울던지 하고 오려고 한다. 당신이 없어도 나는 꾸역꾸역 살아가고 있다고. 당신이 슬퍼할지 섭섭해할지 혹은 대견해할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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