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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Nov 13. 2022

비 맞고 찾아온 벗에게

-214

가끔 이 사람과 내가 어쩌다가 아는 사이가 되었을까가 신기해지는 인연이 있다.


내게는 한 중국인 지인 분이 계신다. 이분과 나는 서로의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고 정확한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른다. 중국 하이난에 사시는 이 분과 대한민국의 경기도에 사는 나는 비행기로 다섯 시간 정도 떨어져 있으며 한 시간의 시차가 난다. 우리가 서로에게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그 정도뿐이다. 이쯤 되면 그런 사이를 과연 지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러게, 이 관계가 정말로 신기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1년 정도, 인터넷에 연재하던 소소한 글이 있었다. 이 분은 그 글의 독자셨다. 내가 그 글을 쓸 때 한국인이 아닌, 즉 한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외국인을 배려해 글을 썼을 리가 없으니 이 분은 아마도 구글이라든가 기타 등등의 서비스를 동원해 일일이 번역을 해 가며 내 글을 읽어주고 계셨다는 뜻이 된다. 그걸로도 모자라 이 분은 같은 나라 말을 쓰는 독자들도 주지 않는 피드백을 번역기까지 동원해 한 자 한 자 꼼꼼하게 남겨주시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우리는 국제택배로 소소한 선물 몇 가지를 주고받았다. 우리의 인연은 그게 다다. 감히 하늘에 오르려는 인간이 미워서 신이 손수 흩어놓았다는 언어의 장벽 덕분에 아마도 지금이 아니었다면 그냥 외계의 언어로 글을 쓰는 사람과 내가 쓰는 글이 상형문자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이지 않을 사람에서 그쳤을, 그런 관계.


지난봄 아픈 일을 겪으면서 나는 연재를 중단했고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그 후로도 잊을만하면 한 번씩 메시지로 나의 안부를 물어주셨다. 가장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지난 이태원 참사 때, 이 분이 가슴 아픈 일이 있었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혹시 휘말리시진 않았는지 걱정된다고 연락을 주신 일이다. 그 메시지를 받고 나는 그 일이 그렇게나 큰 일이었다는 것과 아직도 내게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남아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멍해졌었다.


날씨가 추워졌는데 잘 지내시는지, 따뜻한 차 같은 걸 좀 자주 드시면 좋겠다는 안부인사가 왔다. 몇 년 전 그와 함께 갔던 인사동의 한 카페에서 마셨던 철관음이 향이 좋았던 기억이 나서 그 이야기를 스치듯 했는데, 어제 억수같이 내리는 가을비를 뚫고 그분에게서 택배 한 상자가 도착했다. 그 속에는 '본토의' 철관음이 두 상자, 그리고 안에 은 장식이 박힌 찻잔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이 급작스러운 선물 앞에서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티포트는 있지만 차 거름망을 다 어디로 치워버렸는지 도통 보이지 않아, 어제는 급히 나가 거름망을 하나 사 왔다. 이 글을 쓰고 나면 물을 끓여서, 천 리 머나먼 땅에 사시는 벗이 보내준 차를 한 잔 우려서 찌뿌둥하게 흐린 창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호사를 누려볼 생각이다. 타이밍은 조금 늦었지만 자그마치 중국에서 여기까지 온 시간이 있으니, 그냥 이 것도 조금 늦은 내 생일 선물이라고 생각해 버리려고 한다. 컴퓨터 모니터도 하나 받았고 자그마치 본토의 철관음도 두 상자나 받았으니 올해 생일엔 횡재했네. 그런 말을 하며, 웃어 본다.


더러 슬프고 그보다 더 자주 우울해지지만, 그래도 살아야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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